99세 지미카터 살린 면역항암제 효과? 흑색종으로 감겼던 눈 '번쩍'

[메디컬 인사이드] 오상보 양산부산대병원 종양내과 교수
옵디보 처방으로 항암치료 혁명
암세포의 면역회피 작용 등 막아
구토·탈모 등 부작용도 최소화
경험 많은 종양전문의 관리 필요

흑색종은 60세 이상 고령층에서 발병률이 높다. 이미지투데이

“아니 2주만에 얼굴이 너무 좋아지셨네요. 통증은 좀 어떠세요?”


“예, 통증이 거의 사라져서 진통제 없이도 견딜만 했습니다. 사실 암 진단을 받고 눈이 떠지질 않으니 안사람이 제일 속상해 했거든요. 이틀 전부터 눈이 떠지는 걸 보더니 잘 생긴 얼굴이 돌아왔다며 너무 좋아합니다.”


양산부산대병원 암센터에 외래진료를 받으러 온 서경제(67·남)씨가 미소를 머금고 진료실을 나섰다. 오상보 양산부산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의 권유로 면역항암제 ‘옵디보’(성분명 니볼루맙) 투여를 시작한지 한 달여 만에 종양 때문에 감겨있던 서씨의 눈이 떠진 것이다. 오 교수는 “종양내과 전문의로서 많은 암환자들을 진료해 왔지만 항암치료로 감겼던 눈이 떠진 경우는 처음이라 놀라웠다”며 “면역항암제의 등장은 그동안 난치암으로 여겨졌던 전이성 흑색종 환자의 치료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회고했다.



◇ 노년층 흔히 앓는 ‘안검하수’ 흑색종 때문일수도…검은 점과 감별 어려워

서씨는 2019년 5월 양산부산대병원에서 악성 흑색종 진단을 받았다. 약 2개월 전부터 윗눈꺼풀이 아래로 처지는 증상이 생겼지만 ‘나이 탓이겠거니’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무렵 속쓰림, 구토 증상까지 지속돼 동네 병원에 갔는데 정밀검사가 필요해 보인다는 말에 양산부산대병원에 진료를 잡았다. 위, 대장내시경부터 컴퓨터단층촬영(CT), 자가공명영상(MRI)까지 온갖 검사를 시행하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서씨는 ‘온 몸에 암이 퍼져 있다’는 소견을 듣고 눈 앞이 캄캄해졌다. 안검하수의 원인은 단순히 노화 과정에서 눈꺼풀 올림근의 기능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종양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진 원발암(primary cancer·암이 처음 시작한 장기의 암)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으니 낙심이 됐다.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 병원에 왔더라면 달랐을까” 스스로 병을 키웠다는 생각에 자책할 틈도 없이 뇌로 전이된 암 치료를 위해 전뇌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다. 2주동안 10차례 방사선치료를 받았고 그 사이 흑색종(melanoma)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 피부암 중 가장 예후 나쁜 흑색종, 전이되면 기대여명 9개월 남짓

흑색종은 피부 색소를 생성하는 멜라닌 세포에서 생기는 악성 종양이다.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지역에서는 서양보다 발병률이 낮다보니 질환에 대한 인지도가 부족해 조기 진단되는 경우가 드물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총 2만5491명이 흑색종 진단을 받았다. 지난해 흑색종으로 신규 진단받은 환자는 625명이다. 문제는 흑색종이 피부암 중에서도 악성도가 가장 높다는 점이다.



사진 설명

특히 서씨처럼 수술이 불가능한 전이성 단계에 이르면 기대 여명이 9개월에 불과할 정도로 예후가 불량하다. 피부에서 의심 소견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서씨에게는 의외의 진단이었지만 이미 위, 간, 대장, 림프절, 뼈 모두에서 전이 병변이 발견돼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암이 퍼진 상태였다. 망연자실한 서씨에게 오 교수는 면역항암제를 권했다. 체내에는 면역기능 활성화 또는 비활성화에 관여하는 일종의 스위치 역할을 하는 수용체가 있는데 이런 단백질 수용체를 차단하는 면역항암제가 개발됐고 전이암 환자들에게도 좋은 효과를 보인다는 것이다.


오 교수는 “2015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흑색종 말기 진단을 받았는데 동일한 원리의 면역항암제를 써서 암이 치유됐다”며 “건강보험 적용이 되며 치료비 부담도 크게 줄었다”고 설명했다.



◇ 90세 악성 흑색종 진단받은 카터, ‘면역항암제’ 덕에 9년째 생존

실제 카터가 90세의 나이에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성분명 펨브롤리주맙)를 투여받고 뇌로 전이된 악성 흑색종에서 완치됐다는 소식은 암환자 뿐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게도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비록 얼마 전 암세포가 간과 뇌로 다시 전이돼 연명 치료를 중단한다고 밝혔지만 첫 진단 후 8년 넘게 생존하며 일상을 누릴 수 있었던 데는 면역항암제의 공로가 크다. 체내 면역을 담당하는 T세포 표면의 PD-1 수용체는 신체의 정상세포에 존재하는 PD-L1 또는 PD-L2에 결합해 이들 세포에 대한 잠재적인 면역반응을 비활성화한다.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할 면역반응이 암세포에 듣지 않는 건 암세포들이 PD-L1과 같은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 것과 연관된다.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우리 몸의 정상세포로 인식해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면역회피 작용’이라고 한다. 키트루다, 옵디보와 같은 면역항암제는 암세포 표면에서 발현되는 PD-L1 단백질과 T세포 표면의 PD-1 수용체 간 결합을 방해함으로써 암세포의 면역회피 작용을 막는 단일클론항체다. 자체 면역체계를 활성화시켜 암세포와 싸울 수 있도록 돕는 원리다. 구역, 구토, 탈모 등 기존 세포독성항암제가 갖는 부작용이 없고 치료반응이 나타나면 효과가 오래 지속된다는 장점을 갖췄다. 다만 드물게 폐, 간, 신장 등의 장기에 면역 관련 이상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에 경험이 많은 종양내과 전문의의 관리가 필요하다.



오상보 양산부산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 사진 제공=양산부산대병원

오 교수는 옵디보 단독요법 치료를 시작하고 2주마다 경과를 살폈다. 서씨는 첫 투약 후 2주차부터 진통제를 줄일 수 있을 정도로 통증이 줄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사라지더니 눈이 떠지는 등 방문할 때마다 호전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해 9월과 10월에 시행한 MRI, CT 검사에서 간, 복부 림프절에 전이된 암이 거의 사라졌고 이듬해 6월 내시경 검사에서 내시경적으로 종양이 사라진 완전관해(CR)가 확인됐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2년동안 투약을 진행하고 중단했는데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발 없이 건강한 상태를 유지 중이다. 2년 넘게 면역항암제를 투여 받는 동안 불편감이나 면역치료 관련 독성반응 때문에 입원 또는 응급실에 방문한 이력도 없었다.


오 교수는 “항암 치료 자체가 워낙 장기전이라 막연한 두려움을 갖는 환자들이 많다”며 “암 진단과 치료법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고 의사들도 최선의 치료방법을 제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는 이어 “최근에는 면역항암제와 다른 기전의 약물을 조합해 치료 효과를 높이려는 시도도 활발하다”며 “전문가의 조언을 따라 치료에 전념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희망을 잃지 않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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