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길을 열어준 ‘흑해곡물협정’을 중단하겠다고 경고했다. 주요 7개국(G7)이 다음 달 정상회의를 앞두고 신규 대러 제재의 일환으로 수출 전면 금지를 논의 중이라는 보도가 나오자 곡물을 무기로 강경 대응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러시아의 ‘식량무기화’ 가능성에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급등한 뒤 겨우 안정세를 찾은 국제 식품 가격이 또다시 요동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23일(현지 시간)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러시아에 대한 수출을 전면 금지하겠다는 G7의 생각은 멋진 아이디어”라고 비꼬았다. 메드베데프 부의장은 “대러 수출 금지는 상호주의 차원에서 G7 국가들이 가장 예민하게 여기는 상품군의 수출을 금지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곡물 거래를 포함해 G7 국가들이 필요로 하는 많은 것들이 끝나게 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의 발언은 G7이 신규 대러 제재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온 직후에 나왔다. G7과 유럽연합(EU)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군사 목적으로 전용 가능한 첨단 제품과 산업 기계를 비롯해 고급 차량, 손목시계 등 사치품을 포함한 수백 개 품목의 대러시아 수출을 금하고 있다. 여기에 인도적 목적의 의약품 정도만 제외하고 사실상 모든 품목의 수출을 금지한다는 것이 이번 논의의 핵심이다. G7 관료들은 다음 달 19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개막하는 정상회의를 앞두고 관련 논의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의 ‘맞불’로 러시아도 흑해곡물협정 종료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셈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7월 세계 주요 곡물 생산국 중 하나인 우크라이나의 수출길을 열어주는 내용의 흑해곡물협정을 맺은 바 있다.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 곡물의 핵심 해상 수출로인 흑해 항구가 막히며 전 세계 곡물 가격이 급등하자 튀르키예와 유엔이 중재에 나서 합의가 이뤄졌으며 이 협정에 따라 현재까지 우크라이나 곡물 약 2800만 톤이 전 세계로 수출됐다. 당초 4개월이 기한이었던 이 협정은 지난해 11월과 올해 3월 두 차례 연장됐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미 협정 탈퇴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앞선 연장 당시에도 자국 곡물과 비료 수출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라며 거듭 불만을 드러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이번 주 미국 뉴욕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 만나 흑해곡물협정 연장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러시아는 자국 곡물 수출의 걸림돌이 해소되지 않을 경우 5월 18일 이후 협정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경고한 상태다. 블룸버그통신은 “메드베데프의 발언은 곡물협정 지속을 어렵게 하는 또 다른 장애물이 생겼음을 시사한다”고 전했다.
메드베데프의 경고가 현실화할 경우 곡물 등 식품 가격이 다시 치솟을 것으로 우려된다. 실제로 국제 밀 거래 벤치마크인 시카고상품거래소의 밀 선물 가격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전 부셸(1부셸=27.2㎏)당 7달러대에서 지난해 5월에는 12달러를 돌파하기도 했다.
이미 전 세계를 덮친 이상기후로 주요 식재료 가격이 불안정한 상황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설탕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원당(raw sugar) 선물 가격은 이달 들어 파운드당 24센트를 넘어서며 201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세계 2위 설탕 생산국인 인도가 기상 악화 등을 이유로 생산량 전망치를 하향 조정한 데다 유럽에서도 극심한 가뭄으로 설탕의 원료인 사탕무 재배 면적이 줄면서 ‘슈가플레이션(Sugar+Inflation)’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다. 올리브유 가격도 치솟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해 유럽 전역을 휩쓴 가뭄으로 최대 올리브유 생산국인 스페인이 큰 타격을 받아 올리브유 가격은 6월 이후 60% 가까이 급등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