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경기 둔화가 계속되면서 대기업들도 자금 조달을 위해 은행 문을 두드리고 있다. 고금리 여파로 가계대출이 줄어든 은행들도 대기업 고객 모시기에 적극 나서는 모습이다. 하지만 대기업에 대한 익스포저(위험 노출액)가 확대되는 가운데 경기 침체가 이어질 경우 시중은행들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3일 KB·신한·우리금융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지난해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대기업에 대한 시중은행의 익스포저 규모가 수십조 원에 달하며 일부는 지난해 말 전년 대비 수조 원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KB금융의 경우 32개 대기업집단에 대한 익스포저가 2021년 말 기준 32조 990억 원에서 지난해 말 39조 4350억 원으로 7조 원 이상 증가했다. 신한지주는 재벌로 구성된 10대 주채무계열 대기업집단에 대한 익스포저가 같은 기간 29조 1211억 원에서 33조 73억 원으로 4조 원 가까이 늘었다. 우리금융의 경우 40대 대기업에 대한 익스포저가 27조 2090억 원에서 21조 6220억 원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수십조 원에 달하고 있다. 우리금융은 보고서에 “만약 대기업의 재무 상황이 악화하거나 다른 이유로 인해 대기업에 대한 익스포저의 신용 건전성이 악화된다면 은행은 거액의 대손상각비를 추가로 부담할 가능성이 있고 이는 은행의 실적이나 재무 상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주목할 점은 이처럼 대기업에 대한 여신 위험성이 커지는 상황에도 시중은행들은 지속해서 대기업대출 규모를 늘리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경기 악화 속에 회사채 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이 여의치 않자 대기업들이 은행을 찾고, 은행은 지난해 1월부터 16개월 연속 감소세를 보이는 가계대출을 대신할 수익원으로 대기업 고객 모시기에 나서면서 서로의 니즈가 맞아떨어진 영향으로 풀이된다.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의 올해 4월 대기업 대출 잔액은 전년 동기 대비 약 30% 증가한 114조 6742억 원으로 집계됐다. 2021년 말에는 82조 4093억 원이었는데 1년 뒤인 2022년 말 105조 5174억 원을 기록한 후 올해도 매월 대기업대출 잔액이 늘고 있다. 이처럼 가파르게 증가한 대기업대출 규모 덕분에 가계대출 감소에도 시중은행은 높은 금리를 바탕으로 이자 수익을 낼 수 있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가계대출이 줄고 고금리 시대에 중소기업들의 대출 부담이 커지면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고객은 대기업뿐인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경기 악화가 계속될 경우 부실 위험성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2월 말 기준 대기업대출 연체율은 0.09%로, 중소기업대출 연체율(0.47%)이나 개인사업자대출 연체율(0.39%) 대비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무역적자가 14개월째 계속되고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41.0% 감소하는 등 대기업들을 둘러싼 불안 요소는 남아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말 발표한 ‘금융기관 대출 행태 서베이 결과’에 따르면 국내 은행들은 올해 2분기 대기업에 대한 대출 태도를 전 분기 6에서 3으로 소폭 강화했다. 지수(100~-100)가 마이너스(-)를 보이면 대출 태도를 강화하겠다고 답한 금융기관이 더 많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