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한일정상회담에서 양국 관계 진전에 거듭 합의하면서 한일 협력의 걸림돌이었던 경제제재 갈등은 완전히 일단락됐다. 한국은 일본의 최우대 수출 대상국 지위를 복원하고 양국은 반도체 등 첨단산업 협력에서 더 나아가 전통 산업인 철강 등까지 공조를 넓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이날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가진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미래지향적 협력 파트너로 관계를 심화하는 데 합의했다. 윤 대통령은 “셔틀외교 복원에 12년이 걸렸지만 우리 두 사람의 상호 왕래에는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며 “새롭게 출발한 한일 관계가 속도를 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양국 정상은 올 3월 회담에서 합의한 경제 분야 장관급 협력 채널을 즉시 가동하고 경제안보협의회를 출범하겠다는 입장도 거듭 확인했다. 이번 회담에 따라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우대국) 대우를 이르면 이달 말까지 복원할 예정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이미 지난달 28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로 재지정하기 위한 절차를 개시했다. 일본은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로 한일 관계가 경색된 이듬해인 2019년 일방적으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한국이 화이트리스트에 재지정되면 3년 만에 지위가 복원되는 것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한국에 비해 서류 절차 등이 복잡한 일본의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이르면 이달 내, 늦어도 상반기 내에는 화이트리스트 재지정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국 정상의 합의에 따라 우리 정부와 일본의 산업 담당 관료들, 재계 관계자들 사이의 교류 역시 활발해진다. 미중 간 체제 경쟁이 기술 패권 경쟁으로 집약되면서 미중 간 디커플링을 비롯해 국제 공급망에 대대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만큼 일본을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3월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반도체 소재(불화수소·불화폴리이미드·포토레지스트) 수출규제를 즉시 해제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첨단산업 공급망이 재편되면서 한일 역시 반도체 등 전략물자에 대한 협력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이번 회담에서 양국의 민간 협력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진행했다. 이에 따라 양국은 철강 등 전통 산업까지 협력을 확대한다. 특히 4년 반 만에 ‘한일 철강 분야 민관협의회’가 재개될 예정이다. 한일 철강 분야 민관협의회는 한일 무역 분쟁의 영향으로 2018년 11월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열리지 못했다. 철강 산업은 지난 수년간 이른바 중국의 물량 밀어내기로 인한 단가 하락 압력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등 신시장에서의 경쟁이 심화돼왔다. 하지만 한일의 경제협력 확대에 따라 한일이 제3국 시장 공동 대응과 공동 기술 개발 등에 나설 길이 열릴 가능성이 커졌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양국의 경제협력이 민간을 중심으로 미래 세대를 위해 추진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도 공감했다. 두 정상은 양국을 오가는 항공편을 추가 증편하고 고교생·유학생 등 미래 세대 교류 확대를 통한 양국의 인적 교류를 회복하며 민간 차원의 대화 채널을 확대해야 한다는 인식도 공유했다.
한일 관계 복원의 기조에 따라 경제계도 셔틀외교에 속도를 낼 계획이다. 17일 한일 경제협회는 서울에서 ‘첨단산업 협력 강화’와 ‘한일 기업 제3국 시장 공동 진출’을 협의하기 위한 한일 경제인 회의를 개최한다. 이어 대한상공회의소는 일본상공회의소와 함께 이달 말 ‘한일 청년 인재 플랫폼 구축 방안’을 논의한다. 6월에는 부산 또는 오사카에서 대한상의가 2025년 오사카엑스포와 2030년 부산엑스포를 연계하기 위한 전략 대화를 진행한다. 또 전경련과 게이단렌이 한일 기업 70개사가 참가하는 ‘2023 아시아 비즈니스 서밋’을 7월에 개최할 예정이다.
한일 경제 교류가 활성화되면 국내 중소기업의 수혜도 예상된다. 일본 시장의 경우 우리 중소기업의 수출 비중이 35.6%(2022년 기준)로 10% 중반대인 다른 시장보다 높다. 대일 교역 정상화가 국내 중소·벤처기업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정책 당국으로서는 벤처 산업 진흥을 바라는 일본에 관련 노하우를 전수해줄 수도 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지금 중국과의 교류가 옛날 같지 않은 상황이라 자칫하면 중국과의 경제 교류가 다 끊어질 수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둬야 한다”며 “일본은 기술·자본력이 있는 데다 우리와 정치·문화적으로도 공통분모가 있어 한일 관계는 앞으로 2~3단계는 더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