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엄마가 꿈꾸는…‘졸업’

발달장애 골퍼 이승민 母子
지난해 장애인US오픈 우승
“대회 2연패, 올 최대 목표”
부모님께 더 많은 우승 약속

발달장애 골퍼 이승민(오른쪽)과 어머니 박지애 씨. 용인=오승현 기자

아들이 골프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평생 숙제로 여기는 부모. 그런 어머니께 자신으로부터의 졸업을 선물해 드리고 싶다는 이승민(26·하나금융그룹)은 홀로 세상 앞으로 한 발을 내디딜 언젠가를 꿈꾸고 있다.


“승민이가 조금 다른 모습으로 우리 부부에게 찾아온 순간부터 180도 달라진 삶을 살게 됐어요.”


어머니 박지애 씨는 아직도 2000년 가을의 어느 날을 잊지 못한다.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에서 만 세 살의 이승민을 관찰하던 의사가 “당신의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고 말한 순간이었다. 박 씨는 “쇠망치로 머리통을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022년 여름. 22년 전 어머니를 절망에 빠뜨렸던 이승민은 장애인 US 오픈 골프대회인 US 어댑티브 오픈의 초대 챔피언에 등극하면서 희망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암흑 같던 긴 터널을 달려온 끝에 비로소 한 줄기 빛을 찾은 느낌이었다.


“승민이는 저희에게 다르게 찾아와서 숙제를 안겨줬고 지금도 그 숙제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하지만 함께할 수 있는 날은 한정돼 있어요. 저희 부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숙제를 다 끝냈으면 해요.”


이승민도 어머니의 뜻을 이해하고 있었을까. 그는 “아직도 어머니께서 뒷바라지를 하고 계신다”며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저로부터) 졸업을 선물해드리고 싶다”고 어눌하지만 진심을 담아 자신의 소망을 전했다.



발달장애 골퍼 이승민이 주먹을 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용인=오승현 기자

US 어댑티브 오픈 초대 챔피언


이승민은 지난해 7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파인허스트 리조트에서 열린 제1회 장애인 US 오픈에서 우승하며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다. 태국에서 동계 전지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3월 하순에 만난 이승민은 “우승을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을 많이 했다. 그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때는 너무 좋았고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단독 선두로 맞은 최종 3라운드에서 1언더파 71타를 친 이승민은 3타를 줄인 펠리스 노르만(스웨덴)과 동타가 돼 연장 승부를 펼쳐야 했다. 2개 홀 합산 성적으로 승부를 가리는 연장전에서 버디와 파를 기록한 이승민은 파와 보기를 한 노르만을 2타 차로 제치고 우승했다. 이승민은 “연장까지 가서 힘들게 우승했다”며 “대회 준비를 위해 1부 투어에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스폰서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US 어댑티브 오픈 우승 후 생활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이(이승민): “가장 달라진 것은 발달장애를 가진 이승민이 있다는 걸 많은 사람이 알게 됐다는 점입니다. 인터뷰와 행사 참석 요청도 이곳저곳에서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저와 같은 장애를 가진 친구들에게도 많은 문의가 오는데 어떻게 골프를 시작했는지, 어떻게 훈련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고 있어요.”


박(박지애): “만나자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발달장애도 다 똑같은 케이스일 수는 없어요. 아이들도 다 다르고요. ‘밖에 나가서 부딪히라’는 것을 공통적으로 말씀 드려요. 무언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시작을 하려면 남다른 노력이 필요한데 겁이 나는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어요. 무엇보다 ‘아이가 밖에 나가서 상처받으면 어쩌나’라는 걱정이 가장 많죠. 그런데 그것을 무서워하면 외뿔 고래인 나의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좌충우돌 우당탕탕을 감수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가만히 집에만 있으면서 앉아 있는 건 미래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하루라도 더 살아서 마지막 세상 날까지 지켜줄 수 있다고 하면 OK에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는 혼자 몇 십 년을 살아야 해요.”



올해 목표는 타이틀 방어라고 밝혔습니다. 디펜딩 챔피언으로 달라진 대우가 있을까요.>>>


이: “우승과 함께 시드 5년을 받았어요. 가장 중요한 건 골프 역사 박물관 옆에 이승민의 이름을 남긴 것이에요. 대통령님으로부터 축전을 받았고 SK텔레콤과 서브 계약도 따라왔어요.”


박 “올해 만약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면 미국골프협회(USGA) 측에 대우를 강력하게 요구할 생각이에요. 저희는 US 어댑티브 오픈 우승자에게 US 오픈 등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대회의 초청 자격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장애를 가진 선수들도 더 큰 꿈을 꾸고 이 대회에 참가할 수 있으니까요. USGA의 CEO에게 말을 전달했는데 이사회에 의견을 내보겠다는 답이 왔지만 쉽지 않다고는 들었어요.”



발달장애 골퍼 이승민이 누워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용인=오승현 기자

두 살 무렵 다르게 찾아온 아이


어머니 박 씨의 기억 속 이승민은 태어나서 두 살 무렵까지는 평범하진 않지만 고집이 센 어린 아이였다. 하지만 두 살 무렵부터 조금씩 이상한 조짐이 보였다. 단어를 배열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데 불러도 쳐다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자동차를 가지고 노는 것도 특이했다. 바퀴만 돌리는가 하면 모든 자동차를 일렬로 세워놓고 누워서 노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네 돌이 지나고 한국에 온 뒤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정밀진단을 받은 후 가족의 삶은 완전히 뒤집혔다.


어머니 박 씨의 말이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다 똑같으실 것 같아요. 20여 년 전에는 장애에 대한 인식이 더 열악한 시대였기 때문에 더 앞이 깜깜했어요. 인터넷이 활발한 세상도 아니었고요. 심리 상담하시는 분들이 알려주시는 대로 보편적인 아이들에게 하는 언어치료나 놀이치료밖에 없었어요. 1년 정도 꾸준히 치료를 했는데 승민이가 이 치료에 집중을 못하고 이걸 통해 얼마나 나아질지 의문이 생기더라고요. 제가 클래스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유리창을 통해 보면 선생님과 승민이가 혼연일체가 돼 수업에 집중하는 게 아니었어요.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승민이는 승민이대로 따로따로 수업이 진행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다른 건 없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운동은 언제부터 시작했나요.>>>


박: “승민이가 어릴 때부터 몸을 쓰는 걸 너무 좋아했어요. 활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쳐서 집에서 가만히 있지 못했죠. 놀이터와 공원에 가자는 말을 달고 살던 친구였어요. 어른들이 같이 놀아주다 보면 지칠 정도로 2~3시간이 넘게 너무 행복해했어요. 승민이도 운동을 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았고요. 운동을 한번 시켜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아이스링크에 찾아갔는데 얼음판 위로 잠보니(정빙기)가 돌아가는 걸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아이스링크 지하에서 목동 펭귄스라는 팀이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승민이가 ‘엄마 나 이거 할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다음 날부터 스케이트를 타게 했어요. 아이스하키는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스케이트 레슨과 하키 훈련을 따로 받아야 했는데 정말 열심히 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골프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박: “아이스하키를 열심히 했지만 5~6학년에 들어가면서 바디체크 등 몸을 쓰는 부분이 많아졌어요. 중학교에 들어가는 선수 중에서는 운동을 더 전문적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었는데 단체 운동이다 보니 승민이가 폐를 끼치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승민이가 열 번 중에 한 번 실수하면 팀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팀원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개인 운동을 찾아봤어요.”


이: “TV로 타이거 우즈가 우승하는 장면을 계속 보게 되니 우즈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렸을 때 집에 있는 플라스틱 공과 채를 들고 마당에 나가 공을 치면서 왔다갔다하는 놀이를 했는데 헤드로 공을 맞혔을 때 공이 뜨고 날아가는 게 신기해서 흥미를 느낀 거 같아요.”


박: “골프를 치는 아버지를 따라 종종 골프장을 따라갔어요. 다섯 살 무렵 때에도 성인용 긴 드라이버로 공을 똑바로 보내더라고요. 정말 신기했어요. 공을 맞히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죠. 승민이도 공이 뽕뽕 날아가는 걸 좋아했어요. 지금도 ‘골프가 왜 좋냐’고 물으면 ‘어렸을 때 하늘 위로 공이 날아가는 게 기분이 좋았다’고 답해요.”



발달장애 골퍼 이승민이 드라이버 샷을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용인=오승현 기자

윤슬기 코치와 만남…프로 선수를 꿈꾸다


이승민이 골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중학교 1학년 때다. 일반 주니어 선수들과 똑같이 도내 및 중고등학교 골프협회 대회에 참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로 선수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윤슬기 코치를 만난 뒤부터 이승민의 꿈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윤 코치가 회상했다. “중학교 2학년 전지훈련지에서 승민이를 처음 봤어요. 장애가 있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됐죠. 승민이의 첫인상이 아직도 기억에서 잊히지 않아요. 도로에 대자로 뻗어서 울고 있었거든요. 동반했던 친구들이 놀리기도 하고 은근히 따돌린 것 같더라고요. 지금보다도 의사 표현이 정확하지 않았을 때니 제대로 표현도 하지 못하고 울고만 있었어요. 승민이에게 ‘친구들을 혼내주겠다’고 한 게 첫 만남이었죠.”


윤슬기 코치가 이승민의 전담 캐디 겸 트레이너가 된 것은 불과 4년 전 일이다. “어쩌다 승민이에 대한 기사를 봤어요. 경기 지연에 따른 벌타에 관한 기사였죠. 화가 나더라고요. 제가 알고 있는 승민이는 옆에서 도와주면 일반인과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데 왜 사회가 포용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바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어요.”


어머니는 “처음에는 장난하시는 줄 알았다. 전문 캐디에게 승민이를 부탁하는 건 언감생심이었다”면서 “승민이가 제대로 프로 선수처럼 훈련하게 된 것도 슬기 형님을 만난 뒤부터였다”고 했다.



골프를 하면서 힘들 때도 있었을 것 같아요.>>>


이: “매일이 힘들어요. 제가 가진 장애 때문에 오랜 시간 집중하고 연습하는 게 저에게는 정말 어려워요. 시합할 때 저도 모르는 사이 저만의 생각에 빠져들곤 하는데 집중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말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평상시 연습은 얼마나 하나요.>>>


윤: “승민이와 약속한 게 연습장은 무조건 1등으로 도착해야 한다는 거예요. 연습장 문이 열리는 6시부터 훈련을 시작해요. 오전 11시까지 파3 코스를 돌고 오후에는 체력 훈련 등을 하는 게 일과예요. 집에 가는 시간은 보통 오후 8시 정도고요.”


박: “형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침 8시부터 연습을 했어요. 지금처럼 훈련하는 건 형님을 만난 2019년부터죠.”



겨우내 태국에서 전지훈련을 진행했습니다.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연습하셨나요.>>>


이: “지난해 11월 23일에 태국에 들어갔으니 100일 정도 훈련을 진행했어요. 드라이버 비거리를 늘리는 훈련에 집중했는데 똑바로 멀리 치는 연습을 했어요. 라운드 때 버디를 많이 잡는 연습도 했고요.”


윤: “드라이버 비거리는 한국에서 보통 260~270야드가 나왔어요. 태국 전지훈련 결과 평균 300~310야드로 늘어났어요. 물론 태국의 환경이 비거리가 더 많이 나가긴 하지만 최대 334야드까지 치더라고요.”



특별히 태국에서 전지훈련을 진행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박: “전지훈련을 하면서 대회에 나가면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 기간에 싱하 그룹에서 주최하는 태국 투어 대회가 있었고 주한 태국 대사님께서 도움을 주셔서 참가할 수 있게 됐어요.”



올해 목표는 무엇인가요.>>>


이: “올해 가장 큰 목표는 US 어댑티브 오픈 2연패입니다. PGA 투어 퀄리파잉 토너먼트(QT)에 통과하는 것과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에서 톱 10에 진입하는 것도 보여주고 싶어요. PGA 투어 QT의 경우 2021년에도 도전했는데 올해 다시 한 번 도전하러 갈 계획입니다”



골프를 하면서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이: “오거스타에서 열리는 마스터스 대회에 나가서 예선 통과만 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날 수많은 갤러리의 환호 속에 18번 홀 그린 위로 걸어 올라가는 장면을 꿈꿉니다.”



발달장애 골퍼 이승민(오른쪽)과 어머니 박지애 씨가 웃으며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용인=오승현 기자

자랑스러운 아들의 마지막 소원


이승민은 골프를 하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 지난해 US 어댑티브 오픈 우승을 꼽았다. “챔피언 퍼트를 성공시킨 뒤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는 이승민이 자랑스러운 아들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다.



훌륭한 아들로 비치는 기분은 어떤가요.>>>


이: “지금까지 고생을 많이 한 부모님께 정말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있었는데 요즘은 저로 인해서 부모님이 웃으시고 행복해하시니 너무 좋아요.”



지금까지 살면서 부모님께 한 가장 큰 효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이: “US 어댑티브 오픈에서 우승한 뒤 아버지 친구분들이 ‘이승민이 그 이승민이냐’고 물어보셨다고 해요. 축하 메시지도 많이 받으셨고요. 저로 인해 부모님이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어서 기쁘고 앞으로도 더 많이 웃게 해드리고 싶어요.”


박: “승민이는 우승을 이야기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프로 투어가 됐을 때가 가장 좋았어요. 골프를 처음 시작했을 때 승민이가 투어 프로가 된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못했으니까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았어요. 6일 내내 언더파를 쳐야 정회원이 될 수 있는데 승민이의 집중력으로 6일 경기를 하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에요. 지금도 어떻게 이겨냈는지 신기할 따름이에요.”



어머니께서 오랫동안 뒷바라지를 해오셨는데 어떻게 보답하고 싶나요.>>>


이: “아직도 어머니께서 뒷바라지를 하고 계세요. 언제 끝날지 모르기에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더 좋은 성적을 내고 더 많은 우승을 선물해 드리고 싶어요.”



어머니께 드리고 싶은 특별한 선물이 있다면.>>>


이: “졸업을 선물해주고 싶어요.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더 이해력이 좋아지고 혼자서도 사람들과 관계를 쌓을 수 있을 때가 돼 저로부터 졸업을 시켜드리고 싶어요.”


‘졸업을 선물하고 싶다’는 이승민의 말에 어머니 박지애 씨는 눈물을 글썽였다. “다른 것보다 미래를 생각 안 할 수 없어요. 언젠가 시간이 지나서 저나 남편도 나이가 들어서 승민이를 두고 가는 시점이 올 거예요. 승민이가 한 인간으로서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을 배워나가는 단계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혼자서 라면 하나를 끓여 먹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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