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퍼드대 석학과 대전 노숙인 A씨가 나란히 활시위를 당겼다. 푸른 잔디 위로 화살이 날아갔다. 각각 10여발을 쐈지만 20m 떨어진 과녁을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 12일 오후 1시30분께 수원화성 국궁체험장에서였다.
석학의 이름은 마르코스 코우날라키스(67). 미국 서부 최고의 싱크탱크로 불리는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방문연구원이다. 지상파 방송 NBC와 시사주간지 Newsweek 특파원을 지낸 그는 미국 언론계의 거물이다.
대구가 고향인 A(61)씨는 천생 고아였다. 집도 절도 없이 평생 전국을 떠돌았다. 중학교를 중퇴한 그는 막노동과 환경미화 일을 해가며 근근이 살아왔다고 했다. 4년 전 충남 홍성에서 장파열로 혼자 사경을 헤매다 스스로 파출소에 신고했다. 수술을 받은 뒤 곧바로 노숙인 쉼터인 대전 파랑새둥지로 거처를 옮겨 현재까지 살고 있다. 건강을 되찾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서 자신보다 몸이 불편한 이들을 돌보고 있다.
판이한 처지의 두 사람이 짝꿍처럼 붙어서 활을 쏘게 된 것은 일정이 겹쳤기 때문이다.
쿠우날라키스는 외교부 산하 한국국제교류재단의 ‘교육 분야 유력인사 그룹 초청사업’ 일환으로 지난 7일 한국을 찾았다가 출국을 하루 앞두고 수원을 방문했다. 그의 왼쪽에서 루마니아, 방글라데시, 이라크, 인도, 팔레스타인의 유명대학 총장이나 부총장들이 화살을 쐈다.
A씨는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에서 노숙인 인문학 강의하던 최준영(57)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 대표가 놀러오라고 해서 당일치기로 수원에 왔다. A씨 오른쪽에 서서 화살을 쏜 20~60대 14명도 그와 처지가 비슷하다.
세계적인 석학들과 대전 노숙인들이 같은 시각, 한자리에서 국궁실력을 겨뤘다. 사로를 반씩 나눈 사수들의 객관적 ‘스펙’은 비교가 안됐다. 코우날라키스는 190cm 가까운 장신에 떡 벌어진 어깨를 자랑했다. A씨는 160cm가 채 되지 않는 키에 가녀린 어깨의 소유자였다. 코우날라키스 일행들은 하버드, 버클리, 브링검영 등 이름만 대면 눈이 번쩍 뜨일만한 학벌의 초엘리트들이었다. 국가기관이 짠 정교한 일정표 안에서 그들은 쌓은 학식 덕에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노숙인들은 최준영 대표의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제 막 학문에 눈을 뜨고 있었다. 최 대표의 수사학 강의를 들으며 수년 째 닫혔던 말문을 열게 된 이도 있었다. 이날 점심으로 최 대표의 아내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쌈밥을 먹었다. 도심을 굽이굽이 휘감은 6km 성곽을 걸으며 봄소풍 나온 것처럼 즐거워보였다. 방화수류정을 지나 박지성이 축구 국가대표의 꿈을 꾸던 삼일공고를 건너 화성행궁을 둘러봤다. 일제에 의해 팔달문이 남문으로, 장안문이 북문으로 제멋대로 호칭되다가 수원 역사가들의 노력으로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는 최 대표의 설명에 분개하는 표정도 지었다.
성곽 내벽을 따라 활짝 핀 노란 씀바귀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영상 24도의 때 이른 무더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후 4시께 나들이 안내를 마친 최 대표는 “5년째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4년 동안은 혼자 강의했고, 작년부턴 책고집과 센터가 협약을 체결하고 책고집 회원들이 돌아가며 강의한다”며 “김범준 성균관대 교수, 강태운·김화섭 책고집 운영위원 등이 강의했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행사에 대해 “힘겹게 사는 분들에게 역사문화의 도시 수원의 화성 성곽과 화성행궁을 둘러보는 쉼의 시간을 드리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최 대표와의 인연으로 수원을 찾은 노숙인들은 무엇을 얻고 갈까.
4개월 전 거리노숙을 청산하고 대전 노숙인쉼터에서 기거하고 있다는 B(48)씨는 “사업을 하려고 했는데 사기를 당했다. 같이 하려던 사람이 돈을 들고튀었다.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최 대표의 인문학 강의를 듣다가 철학에 심취해 있다고 했다. ‘니체’의 허무주의를 탐독하고 있다며 최근 한국사와 세계사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다고 했다. B씨는 "고등학교 때 남한산성을 간 적 있는데 그 이후 이렇게 큰 성곽은 처음 본다"며 “좋은 추억을 갖고 간다. 내년에 또 오고 싶다”고 말했다.
대전 노숙인들의 수원나들이는 올해로 3회째를 맞았다.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 예산이 넉넉하지 않아 책고집 회원들이 십시일반 경비를 보태고 있다. 관의 지원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