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시에서 178조 원을 운용하는 ‘큰손’인 자산운용사(투신)들이 긴 매도 행진을 멈추고 최근 순매수로 돌아서 시장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특히 운용사들은 고금리에 짓눌려 소외됐던 대형 성장주를 적극 담고 있어 주목된다. 또 다른 기관투자가 중 하나인 사모펀드 역시 투신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절대 수익(주가 등락과 무관한 수익)을 추구하는 공모·사모펀드들이 향후 ‘박스피’ 탈출을 이끌지 기대된다.
15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투신권은 최근 11거래일(4월 27~5월15일) 중 8일을 순매수했다. 이 기간 누적 순매수액은 1910억 원에 달해 금융투자와 연기금 등이 순매도에 나선 것과 대비되는 행보를 보였다.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3월 투신이 4740억 원을 순매도한 데 이어 지난달에도 5210억 원을 팔아치운 것을 고려하면 자산운용사들의 투자 방향이 ‘사자(Buy)’로 변화하고 있다는 분석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이달 들어 사모펀드가 270억 원을 사들이며 매수 행렬에 동참한 것도 이 같은 관측에 힘을 싣고 있다. 사모펀드는 올 초부터 지난달까지 2조 9250억 원을 순매도해 증시 상승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사모펀드는 소수 종목을 빠르게 매매하며 수익을 챙기는 방식으로 절대 수익을 추구한다.
투신은 대형주들 가운데서도 성장주에 주목했다. 최근 네이버를 680억 원어치 순매수한 것을 비롯해 엔씨소프트(036570)(410억 원), 셀트리온헬스케어(091990)(150억 원), 셀트리온(068270)(120억 원) 등을 편입했다. 실적 개선세가 뚜렷한 전자 부품 관련주도 사들였다. 아이폰15, 혼합현실(MR) 헤드셋 등 애플 신제품 출시에 따른 수혜가 예상되는 LG이노텍(011070)을 370억 원어치 순매수했고 올 1분기 역대 최고 분기 실적을 낸 전자기기 부품 업체 솔루엠도 170억 원어치를 담았다. 반면 가치주로 평가받는 한화솔루션(009830)과 LG화학(051910), 두산에너빌리티(034020)는 580억 원, 250억 원, 310억 원씩 팔아치웠다.
투신이 점찍은 종목들의 투자 성과도 좋은 편이다. 투신의 매수 강도가 강해진 지난달 27일부터 이날까지 네이버는 12.7% 급등했고 LG이노텍도 8% 가까이 뛰었다. 셀트리온헬스케어와 셀트리온은 같은 기간 각각 5.77%, 1.87% 올랐다.
증시 전문가들은 대규모 물량을 쏟아내면서 지수 하락에 베팅하던 투신이 다시 돌아온 이유로 성장 테마 상장지수펀드(ETF)의 규모가 증가한 점을 꼽았다. 기준금리 인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기대가 형성되면서 성장주를 담은 ETF에 자금이 유입된 효과라는 분석이다.
특히 챗GPT를 필두로 한 인공지능(AI)·바이오 등 미래 성장 테마에 기관투자가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외국인도 이달 들어 네이버에 2269억 원을 투자해 AI 분야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김용구 삼성증권 수석연구위원은 “거시적으로 장·단기 금리 차이가 줄면서 가치주보다 성장주에 대한 투자심리가 회복하는 모습”이라며 “경기나 실적 전망이 불투명해 투자자들이 대형 성장주를 선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투신의 순매도 경향이 뚜렷해지려면 개인들의 펀드 가입 등 간접 투자가 좀 더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운용사들이 국내 주식시장에서 운용하는 자산(국내 주식형펀드 순자산+일임 평가액)은 지난해 말 160조 5000억 원에서 올 1분기 177조 7000억 원으로 늘었다. 김 연구위원은 “개인의 펀드 투자가 늘어나면 자산운용사가 주식에 투자할 ‘실탄’도 함께 증가해 본격적으로 매수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