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6일 간호법 제정안에 대해 2번째 재의 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보건의료계 직역 단체 간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간호사 단체는 "어떤 의료 기득권에도 영향을 받지 않겠다더니 1년만에 간호법 제정 약속을 파기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의사, 간호조무사 등 간호법을 극렬히 반대하던 의료직역 단체들은 이번 결정에 환호하며 17일로 예고했던 의료연대 총파업을 유보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중범죄 의사면허취소법에 대해서는 헌법 소원 등을 통해 대응하겠다고 예고하며 갈등의 여지를 남겼다.
어느 정도 예견됐던 사안이지만 윤 대통령이 이날 국무회의에서 "간호법안이 유관 직역 간 과도한 갈등을 불러 일으킨다"며 끝내 거부권을 행사하자 간호계는 당정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드러냈다. 윤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 대한간호협회 회관에 방문해 “정부를 맡게 되면 (간호법을) 검토해서 의료 기득권 등에 영향 받지 않고 제가 할 것이다. 믿어달라"고 발언한 부분이 담긴 영상을 공개하며 간호법이 대선 공약임을 적극 어필해 왔던 만큼 이들 단체가 느낀 배신감은 컸다.
김영경 대한간호협회장은 이날 오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 대통령이 후안무치한 탐관오리들이 건의한 간호법 거부권을 수용했다"며 "후보 시절 약속을 믿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간호법 제정 공약을 파기했다"고 비난했다. 이어 "공정하고 상식적이지 못한 불의한 정치인과 관료들을 2023년 총선기획단 활동을 통해 단죄하고 파면하는 투쟁을 전개하겠다"며 "즉각 국회에서 재의할 것을 정중히 요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회장은 "더 나은 간호와 돌봄을 누릴 권리를 박탈당한 5000만 국민께서도 무엇이 진실인지 분명히 알 권리가 있다"며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그간의 모든 진실을 국민들께 소상히 알리는 동시에 간호법 제정을 위한 투쟁을 끝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간협은 앞서 회원 대상 설문조사에서 단체행동에 대해 98.6%의 동의를 확보한 상태다. 그동안 의료계 총파업을 강도높게 비판해 온 만큼 파업 등 의료공백을 초래하지 않는 선에서 단체행동에 나서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간협에 가입되어 있는 인원은 24만 명 남짓이다. 하지만 2021년 기준 간호사 면허 보유자 수는 46만 명에 육박해 2배 가량 많다. 지난 11일 총선 기획단을 꾸린 만큼 현재로선 내년 총선까지 더불어민주당과 힘을 합쳐 국민의힘 저격에 나서는 한편 간호법 제정을 재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간호법 제정을 지지해 온 보건의료노조도 힘을 보탤 전망이다.
보건의료노조는 이날 성명을 통해 "간호법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 수준이 얼마나 편협했던 것인지 확인하는 대목"이라며 "대선 전후 꼭 필요한 법이라며 법 제정을 공언하다가 몇몇 직역 단체들의 왜곡주장에 부화뇌동해 돌연 간호법을 의료체계 붕괴법으로 둔갑시켜 사회적 갈등을 부추겨온 것은 정부와 국민의힘"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국회의 정당한 입법권조차 무력화시키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정부 입맛대로 법을 골라 거부권을 행사하는 정치의 수준은 안타까운 수준을 넘어 부끄러울 지경"이라며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마저 멈춰 세우는 행정독재와 의사단체가 반대하면 그 어떤 법도 제정되지 못하는 의사공화국의 민낯이 더없이 안타깝다"고 날을 세웠다.
의사, 간호조무사 등 간호법 제정을 반대하는 보건의료 직역 13개 단체가 참여하는 13보건의료연대는 이날 서울 용산 대한의사협회 회관 천막농성장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윤 대통령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간호법 제정안에 대해 국회에 재의를 요구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환영한다"며 "오늘 결과에 아쉬움이 있지만 우선 17일 계획한 연대 총파업은 국민 건강권을 지켜야 한다는 깊은 고뇌 끝에 국회 재의결 시까지 유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의료연대는 이날 오전 온라인 투표를 통해 17일로 예정됐던 총파업에 대해서도 부류하기로 결정했다. 의료현장 혼란을 좌우할 대학병원 전공의(레지던트, 인턴)들도 의협 비상대책위원회의 투쟁 로드맵을 따른다는 입장이어서 당장 진료현장의 혼란은 면할 수 있게 됐다.
다만 이들은 총파업 보류에 대해 어디까지나 '국회 재의결까지'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들은 간호법과 함께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의사면허취소법이 신속히 개정될 수 있도록 국회와 정부를 향해 지속적으로 어필할 계획이다.
이필수 대한의사협회장은 "이번 기회를 통해 분열된 보건의료계가 한목소리로 각 직역의 처우를 개선하면서 국민의 건강권을 함께 지켜나가길 바란다"며 "헌법소원 등을 통해 내년 총선 전까지 의료법 개정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간호법과 함께 지난달 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일명 ‘중범죄 의사면허취소법’(의료법 개정안)은 의료인 결격 및 면허취소 사유의 범위가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개정안은 현행 의료법에서 △정신질환자 △마약중독자 △금치산자 △면허 대여 △허위 진단서 작성 및 진료비 부당 청구 등에 한정돼 있는 의사면허 취소 사유를 ‘모든 법령에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경우’로 확대했다. 의협, 치협 등은 면허취소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해 형평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하고 있다. 교통사고 등 의료행위와는 전혀 무관한 행위까지 면허 취소 사유로 포함시킨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기피 진료과를 포함한 필수의료 분야의 인력 부족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보건의료 시스템의 붕괴를 야기해 장기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우려가 큰 법안"이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의료연대는 국무회의 개최 당일 오전에도 대한의사협회 회관 앞 천막농성장에서 '의료악법을 저지하겠다’며 20일째 릴레이 단식 투쟁을 이어갔다.
이날 단식투쟁에 동참한 최운창 전라남도의사회장은 "오늘 간호법 제정안에 대한 대통령 거부권 행사가 있었는데 좋은 소식”라면서도 “의료인 면허취소법 역시 과잉입법임에도 대통령 거부권이 행사되지 않아 아쉽다. 이러한 입법 폭거에 대해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고 밝혔다.
박명하 의협 비대위원장은 “의사면허취소법의 경우 공포된 후 시행까지 1년 정도 시간이 남아 있다”며 "다양한 방법으로 원상 복구 또는 국민의 정서 등을 고려해 최소한 중대범죄나 성범죄에만 국한되는 방향으로 개정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태근 대한치과협회장은 "의사면허취소법은 이중처벌이자 과잉처벌이며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대한한의사협회와도 연대해 헌법소원을 진행하는 동시에 법 개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정치권에 계속 얘기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