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005930)가 자체 개발한 자율주행 알고리즘(소프트웨어)으로 경기도 수원에서 강원도 강릉까지 ‘운전자 무개입 주행’ 시험에 성공한 것으로 확인됐다. 악천후 등 비상 상황을 제외하고는 운전자가 개입하지 않는 ‘레벨4’ 자율주행 실현을 위해 필요한 선행 기술을 확보한 것으로 해석된다. 자율주행차용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센서에 더해 자율주행차용 ‘두뇌’까지 개발 영역을 공격적으로 넓히며 전장 사업에 전사적 역량을 집중하는 모습이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선행 연구개발(R&D) 조직인 SAIT(옛 삼성종합기술원)는 지난해 10월 수원에서 강릉에 이르는 200㎞ 구간에서 운전자 무개입 주행 시험에 성공했다.
주행 시험은 글로벌 완성차의 특정 모델에 라이다(LIDAR) 등 다른 회사의 자율주행 장치를 얹어 SAIT가 연구 중인 소프트웨어와 알고리즘을 테스트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기술 개발 단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램프 구간(높낮이가 다른 두 도로 등을 연결하는 구간) 주행, 특수목적차량 인식, 자동 차선 변경 등의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전날 서울 양재동에서 열린 ‘사물인터넷(IoT)기술&비즈니스포럼’에서 SAIT의 자율주행 성과를 소개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는 2017년 삼성전자가 국토교통부의 자율주행차 임시 운행 허가를 받은 지 5년 만에 거둔 성과다. 신청 당시 삼성전자는 ‘신뢰할 수 있는 자율주행 알고리즘과 인공지능·딥러닝이 결합된 차세대 센서 지능형 부품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SAIT는 내부적으로 레벨4 수준의 자율주행 핵심 기술을 개발해 양산 중인 레벨2와 상용화 단계인 레벨3 솔루션에 대응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테슬라나 현대자동차 등 완성차 업체들의 자율주행 기술 개발 로드맵 목표가 ‘제조 상용화’라면 삼성전자는 DS사업부와 하만을 중심으로 한 차량용 반도체와 전장용 부품, 솔루션 사업과의 시너지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종합기술원의 선행 연구는 도전적 목표 달성을 위해 5년이 넘는 긴 기간에 진행되는데 자율주행 기술도 그 중 하나”라며 “관련 사업부에서 필요로 하는 시점이 오면 기술을 내주는 방식으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완성차 업체가 아닌 삼성전자가 자율주행 알고리즘 기술을 장기 과제로 놓고 개발에 집중하는 것은 5년 뒤 900조 원 규모까지 성장할 미래차 시장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포석이 깔려 있다. 미래차 시장의 구심점이 엔진 등 하드웨어에서 자율주행·전기차에 탑재되는 소프트웨어로 넘어간 만큼 복수 사업부와 연구개발(R&D) 조직의 역량을 총결집해야만 전장 부품 시장을 주도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미국 출장에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자율주행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등 전장 사업 확대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 역시 이러한 전략의 연장선이다.
SAIT(옛 삼성종합기술원)이 개발한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는 최소 레벨3를 충족하고 레벨4 실현을 위한 여러 추가 기술이 적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자동차공학회(SAE)의 분류에 따르면 자율주행 레벨3는 고속도로 같은 일부 조건에서 자동차가 주도권을 갖고 스스로 운행하고 레벨4는 비상 상황 등 특정 조건에서만 운전자가 개입한다. 비록 선행 연구라는 점에서 제조나 상용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는 않지만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과 견줘 뒤지지 않는 수준의 기술 고도화가 진행 중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해당 주행 시험이 진행된 것은 맞지만 자율주행 기술 단계는 확인해주기 어렵다”고 말했다.
퀀텀닷(QD) 디스플레이, 완전 전고체배터리(ASSB) 등을 개발하고 있는 SAIT는 레벨4 자율주행 전기차 핵심 기술 개발을 목표로 2010년대 말부터 자율주행 연구를 꾸준히 이어왔다. 이들이 자율주행차의 ‘두뇌’ 개발에 집중하는 것은 미래차 시장에서 마지막 남은 ‘퍼즐’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삼성디스플레이·삼성SDI·삼성전기 등은 BMW·페라리·테슬라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과 광범위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며 그룹 차원에서 전장 기술 무기를 갈고닦고 있다. 차량용 반도체와 부품, 디스플레이 경쟁력을 갖춘 상황에서 스스로 배우고 발전해나가는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기술까지 보유한다면 일종의 ‘종합 미래차 플랫폼’을 시도해볼 수도 있다.
기존 사업과의 시너지도 자연스럽게 극대화할 수 있다. 자율주행 선행 연구 조직과 현업 사업부 간 업무적 소통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세대 시스템온칩(SoC) 설계 구조를 고려한 알고리즘을 만들어 제품 개발에 활용하거나 특정 전장 부품의 한계를 극복하고 단가를 낮추기 위해 소프트웨어 기술 적용 방안을 제안하는 식이다.
외연 확대의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파운드리 사업에서는 2019년부터 테슬라에 14나노 완전자율주행(FSD) 반도체를 시작으로 자율주행 칩을 공급해왔고 2월에는 첨단 5나노 파운드리 공정으로 미국 인공지능(AI) 반도체 전문 기업 ‘암바렐라’의 자율주행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발표했다. LSI사업부는 BMW에 차량용 반도체 시제품을 공급하며 고부가 설계 프로젝트를 타진하고 있다. 메모리 사업에서는 지난해 7년 연속으로 차량용 반도체 분야에서 매출 신기록을 달성했다. 한때 ‘아픈 손가락’으로 불렸던 하만 역시 지난해와 올해 1분기에 실적 신기록을 쓰며 사업 안정화 궤도에 접어들었다.
자율주행을 비롯한 미래차 시장에서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삼성의 의지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회장의 동선에서도 읽을 수 있다. 회장 취임 직후 이 회장은 삼성전기 부산사업장을 방문해 전장용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생산 시설을 둘러봤고 지난해 말에는 올리버 칩세 BMW 최고경영자(CEO)와 만나 전장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 미국 출장을 떠난 10일(현지 시간)에는 실리콘밸리에서 머스크 CEO와 만나 자율주행 반도체와 관련한 여러 대화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는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경계현 사장,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을 책임지는 최시영 사장도 배석했다.
전장 시장에서 삼성을 비롯한 글로벌 정보기술(IT) 업체들의 경쟁은 하루가 다르게 열기를 높여가고 있다. 모바일 칩셋 강자인 퀄컴은 이달 초 이스라엘 차량용 반도체 기업 오토톡스를 인수했다. AI 반도체 분야 강자인 엔비디아는 자율주행 솔루션 ‘엔비디아 드라이브 오린’을 볼보에 도입하고 2025년 재규어랜드로버에 차량용 전용 반도체와 소프트웨어를 공급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인텔(모빌아이), 구글(웨이모), 애플 등이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시장을 놓고 치열한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에 따르면 글로벌 전장 시장 규모는 내년 4000억 달러에서 2028년에는 7000억 달러(약 924조 원)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