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자동차 시장이 성장하며 중소기업 영역이었던 충전 시장에 대기업들이 속속 뛰어들고 있다. 그룹 계열사의 사업 역량과 자금력을 무기로 전기차 시대 ‘개화’에 맞춰 급속한 성장이 예상되는 충전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의도다. 전기차 충전소를 온오프라인을 관통하는 플랫폼으로 키워 시장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포석도 깔려 있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전기차 충전 시장에 SK·현대차(005380)·LG·GS(078930)·롯데 등 사실상 주요 대기업이 모두 참전했다. 기존 업체를 인수합병(M&A)하거나 자체 사업을 출범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기차 충전 사업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SK그룹은 전기차 충전기를 생산하는 SK시그넷, 초급속 충전기를 운영하는 SK일렉링크, 주차와 연계한 충전 서비스를 맡은 SK E&S를 통해 사업 연계를 꾀하고 있다. LG그룹과 GS그룹 역시 충전기 제조사와 운영 업체를 인수하며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LG전자(066570)는 충전기 업체 애플망고를 인수했고 LG유플러스(032640)는 충전소 검색·예약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GS는 GS커넥트와 차지비를 통해 완속 충전 시장의 25%를 점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차그룹은 초고속 충전기 설치와 운영에 집중하고 있다. 충전 인프라 확대에 기여해 자사의 전기차 판매를 유도하고 충전 생태계를 구축하는 선순환을 이루겠다는 판단에서다. 이와 함께 롯데와 신세계 등 유통 기업도 전국에 포진한 자사 매장을 활용해 충전기 구축 작업에 돌입했다.
대기업들은 전기차 충전 사업의 밸류체인을 갖춰 관련 시장의 성장에 대비하고 기존 사업과 연계를 추진할 방침이다. 전기차 충전 시장은 전동화 전환 추세와 맞물려 성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독일 컨설팅 기관 롤랜드버거에 따르면 글로벌 전기차 충전 시장 규모는 올해 550억 달러(약 72조 원)에서 2030년에는 3250억 달러(약 427조 원) 규모로 6배 가까이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대기업들이 전기차 충전 사업에 뛰어든 데는 계열사의 역량을 동원해 충전 밸류체인(가치사슬) 전반에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전기차 충전기 제조와 판매부터 충전 인프라 운영, 연관 모빌리티 서비스 제공까지 충전과 관련한 모든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춰 기업 간 거래(B2B)와 기업 대 소비자 거래(B2C)를 포괄하는 사업 모델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그룹 중에서는 SK·GS의 행보가 매섭다. 두 그룹 모두 전국에 주유소망을 갖고 있는데 머지않아 주유소가 전기차 충전소로 전환돼 성장의 축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SK그룹에서는 SK시그넷, SK일렉링크, SK E&S가 각자 역할을 분담해 전기차 충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룹이 2년 전 인수한 SK시그넷은 충전기 생산과 판매를 담당한다. 지난해에만 1600억 원 넘는 매출을 거둔 알짜 기업이다. 특히 미국에서 시장점유율 1위에 오르며 글로벌 2위 사업자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했다.
SK시그넷이 충전기 제조를 담당한다면 SK네트웍스(001740)는 인프라 운영 부문에 힘을 싣고 있다. SK네트웍스는 지난해 국내 최대 민간 급속충전기 운영사 에스에스차저를 인수해 SK일렉링크로 재출범시켰는데 현재 SK일렉링크가 운영하는 충전기는 2200여 기로 지난해 8월보다 2배가량 늘었다. SK E&S는 모빌리티 라이프와 연계한 서비스를 선보였다. 5600개 이상의 주차장 네트워크를 보유한 자회사 파킹클라우드와 연계한 충전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자사 주차장 네트워크에 충전기를 설치하고 애플리케이션 회원에게 별도의 카드 없이도 충전 요금을 결제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GS그룹은 충전기 설치와 컨설팅, 구축과 운영, 애프터서비스(AS)까지 담당하는 GS커넥트 외에도 GS에너지가 지난해 국내 대형 충전 서비스 기업 차지비를 975억 원에 인수하며 사업 시너지 효과를 꾀하고 있다. 정부가 60%의 보조금을 주는 완속충전 시장을 타깃으로 해 진출했는데 현재 시장의 25%를 GS그룹이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GS그룹은 LG그룹과 함께 전기차 충전 밸류체인을 갖추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LG전자는 지난해 GS에너지·GS네오텍과 공동으로 충전기 업체 애플망고를 인수한 데 이어 2분기 중 충전기 생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LG유플러스는 전기차 충전 인프라 사업을 맡는다. 전기차 충전소 검색·예약 플랫폼 ‘볼트업’을 선보였고 자사 구독 서비스에 이를 추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대기업들이 전기차 충전기 제조와 충전 인프라 운영, 연계 서비스 제공으로 이어지는 밸류체인을 구축할 경우 사업의 범위를 무궁무진하게 넓힐 수 있다고 전망한다. 예컨대 앱 하나로 전기차 충전부터 주차와 중고차 매각을 비롯한 모빌리티 서비스까지 연계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충전 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들은 전기차 충전 사업 자체를 고도화할 뿐 아니라 전력·리테일·모빌리티 등 다양한 사업과 연계해 얼마든지 모델을 진화시킬 수 있다”며 “가능성을 놓고 보면 전기차 충전 사업은 이제 시작에 불과한 단계”라고 말했다.
회사의 강점을 활용해 밸류체인의 특정 부분에 집중하는 사례도 있다. 현대차그룹이 대표적이다. 완성차 업체인 현대차그룹은 인프라 확대에 방점을 찍고 초고속 충전기 설치에 집중하고 있다. 충전 인프라를 보급해야 전기차 판매량도 더 빠르게 늘릴 수 있어서다. 이를 위해 현대차그룹은 2년 전 계열사로 편입한 한국전기차충전서비스를 앞세워 2025년까지 초고속 충전기 3000기를 구축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자체 초고속 충전 브랜드 ‘이피트(E-pit)’도 출범했다.
이와 함께 전기차 충전기 제조사 중앙제어를 인수한 롯데는 전국에 있는 자사 백화점과 마트 141곳에 충전기를 우선 설치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신세계 역시 그룹 내 주요 매장을 중심으로 자사의 전기차 충전 서비스 스파로스 EV의 충전 인프라를 1100여 기 확대했다.
충전 사업에는 물론 과제도 남아 있다. 아직 유의미한 수익이 나지 않고 있어 꾸준한 추가 투자와 서비스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 업계에서는 전기차 충전 시장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민간에 유리한 사업 환경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전기차 급속충전 요금을 현실화해 민간 사업자의 수익으로 이어지게 유도하는 등의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대기업들이 충전 사업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시장에 뛰어들고 있지만 현시점에서는 수익을 내기 어렵다”며 “전기차 보급이 확대되며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도 있겠지만 정부 차원에서도 급속충전과 완속충전의 요금을 분명하게 차별화하는 등 사업 모델 활성화를 유도할 정책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