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찬란하다. 장미, 모란, 찔레, 이팝 등의 꽃이 피고 진다. 김영랑은 시 ‘오월’에서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졌다”고 노래했다.
45년 전인 1978년의 5월에는 한국 골프에서 새로운 꽃이 피었다. 여자 프로골퍼의 탄생이다. 이전까지 프로골퍼는 남자밖에 없었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는 1975년 11월 이사회를 통해 여자 프로골퍼를 육성해 선발하기로 했는데, 그 결과가 1978년 5월 25일부터 26일까지 이틀간 경기 양주의 로얄(현 레이크우드)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여자프로 선발전이다. 13명이 응시해 4명이 합격했다. 강춘자는 한명현, 구옥희와 동타를 달리다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잡아 가장 좋은 성적(155타)을 냈다. 회원번호 1번의 영광을 차지했다. 그 뒤를 한명현, 구옥희, 안종현이 이었다.
당시 한 스포츠신문은 ‘한국골프 史上 처음 女子골퍼 4명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이 소식을 전했다. 신문은 “우리나라 골프 사상 처음 여자프로 4명이 탄생했다. 프로골프협회(PGA)의 테스트 경기에서 뽑힌 아가씨 프로들의 이름은 강춘자, 구옥희, 한명현, 그리고 안종현 양. 각각 2~4년씩 수련을 쌓은 끝에 대망의 프로등용문을 통과한 것”이라고 썼다. 그러면서 성적, 소속, 스승, 출신학교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예를 들어 강춘자에 대해서는 ‘155타(78-77), 마사회 소속, 조태호 프로에게 사사, 성동여상 졸업, 3년 수련, 164cm, 57kg’이라고 전했다.
강춘자 전 한국여자프로골프투어(KLPGT) 대표는 “테스트를 1등으로 통과했던 그날 날씨가 참 좋았다”고 오래된 기억을 되살렸다. 고대하던 프로가 됐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그해 대회는 KLPGA 선수권 달랑 1개, 이듬해인 1979년에는 3개였다. 강 전 대표는 “오랜 기간 죽어라 연습해 프로가 됐는데 막상 뛸 대회가 없으니 서운했다”고 말했다. 보릿고개 때문에 배곯던 그 시절. 찔레꽃 필 무렵에는 딸네 집에도 안 간다고 했다. 김영랑의 표현을 빌리자면 ‘찬란한 슬픔의 봄’이었다.
초기 여성프로들은 눈을 일본으로 돌렸다. 4년 뒤인 1982년 5월의 봄. 일본 도쿄의 도쿄요미우리 컨트리클럽에서 개막한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월드 레이디스 골프 토너먼트에 구옥희, 강춘자, 안종현이 초청 선수로 출전했다. 한국 여자프로골프의 첫 해외 진출이다. 구옥희는 홀로 최종 3라운드까지 살아남아 공동 35위에 올랐다.
다시 세월이 흘러 첫 여자프로가 탄생한지 꼭 20년이 되던 1998년 5월의 봄. 한국 여자골프는 또 다른 경사를 맞았다. 박세리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맥도날드 LPGA 챔피언십 정상에 오른 것이다. 박세리 개인의 LPGA 투어 첫 우승이자 한국 여자골퍼의 LPGA 투어 첫 메이저 제패였다. 6주 뒤 ‘맨발 샷’의 명장면을 연출하며 거둔 US 여자오픈 우승도 앞선 5월의 LPGA 챔피언십에서 얻은 자신감에서 비롯됐다.
올 봄에는 디즈니+의 드라마 ‘카지노’의 히트 덕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새삼 주목을 받았다. 한국 여자골프의 첫 네 송이 꽃은 열흘의 붉은 호사도 누리지 못하는 신세였지만 45년 동안 피고 지기를 반복해 이제 2887송이로 분화했다. 크기도 모양도 화려해졌다. 시즌 총상금을 보면 1989년 1억 원, 1995년 10억 원, 그리고 2012년에는 100억 원을 돌파했다. 올해에는 정규 투어 상금이 처음으로 300억 원을 넘어섰다. 4월부터 11월 초까지 거의 매주 빠지지 않고 대회가 열린다.
처음 프로가 될 때 22세 ‘꽃청춘’이었던 강춘자 전 대표는 오랜 기간 KLPGA에서 일하다 지난 4월 퇴임했다. 그는 “동갑이던 옥희는 허망하게 일본에서 숨졌고, 함께 협회를 이끌었던 명현 언니는 고생만 하다 좋은 날은 보지도 못하고 떠나 아쉽다”고 했다. 호적상으로는 한 살 어렸지만 1월생이라서 강춘자, 구옥희와 친구로 지냈던 안종현은 급성 백혈병으로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떴다.
KLPGA는 5월 26일을 창립기념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