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며 최장 30년의 사실상 ‘종신 집권’의 길을 열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외교적으로는 친(親)러시아 행보를 이어가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내 ‘이단아’ 역할을 지속해 서방의 골치를 아프게 할 것으로 전망되며 국내적으로는 이슬람 권위주의 통치 체제를 더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살인적 인플레이션에도 되레 저금리를 유지하는 비전통적 경제정책을 고수해 경제난이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29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전날 치러진 튀르키예 대선 결선투표 결과 정의개발당(AKP) 소속의 에르도안 현 대통령은 52.1%의 득표율로 47.9%에 그친 야권 단일 후보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CHP) 대표를 눌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승리로 ‘튀르키예 세기’의 문이 열렸다”며 “선거 결과는 아무도 우리의 이익을 탐낼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고 밝혔다. 2018년 취임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2028년까지 추가로 5년간 집권하게 됐다.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되면 추가로 5년간 재임이 가능하게 한 헌법에 따라 2033년까지도 집권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 경우 2003년 총리로 시작된 그의 집권 기간은 30년으로 연장된다.
이번 대선에서는 에르도안의 패배를 점치는 사람이 많았다. 지난해 10월 기준 85%가 넘는 초인플레이션에 리라화 가치 폭락으로 경제가 파탄 직전에 몰렸기 때문이다. 올 2월에는 21세기 최악의 하나로 평가되는 대지진도 발생하며 정부의 부실 대응, 부패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정부 재정을 이용해 학생들에게 무료 주유권과 공짜 인터넷 이용권을 제공하고 공공 부문 근로자의 임금과 최저임금을 올리는 등 표퓰리즘 정책을 쏟아냈다. 이에 이달 14일 치러진 1차 투표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49.52%의 득표율로 44.88%의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따돌렸으며 1차 투표에서 5.17%를 득표해 3위를 차지한 시난 오안 승리당 대표가 에르도안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강력한 튀르키예를 목표로 한 지역 패권 추구 외교 노선과 친러시아 노선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날 에르도안 대통령을 ‘친애하는 친구’라고 칭하고 “당신의 승리는 국가 주권을 강화하고 독립적으로 외교정책을 시행하려는 노력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축전을 보냈다. 에르도안 대통령도 이날 승리 연설에서 푸틴 대통령이 제안한 ‘가스 허브 프로젝트’를 진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튀르키예가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의 허브가 되는 방안을 푸틴 대통령과 논의해왔다.
반면 서방과의 ‘불편한 동거’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트위터에 “재선을 축하한다”며 “나토 동맹국으로서 양자 이슈와 공동의 글로벌 도전 과제에 대해 협력을 이어갈 것을 기대한다”고 짧게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이 나토를 언급한 것을 두고 일부 외신은 스웨덴의 나토 가입 승인을 앞둔 시점에서 백악관의 의중을 담은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튀르키예는 현재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반대하고 있다. 한편 에르도안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 중재에 더욱 적극 나설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튀르키예 국내적으로는 이슬람주의와 권위주의가 결합한 통치 체제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17년 개헌을 통해 부통령 및 법관 임명권, 의회 해산권, 국가비상사태 선포권 등 막강한 권한을 확보했다. 아울러 이슬람주의자인 에르도안 대통령은 계속해서 이슬람 색채를 강화하며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주의’ 기반을 약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에 건국 이념인 세속주의가 건국 100주년인 올해로 종언을 고하고 이슬람주의가 전면화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경제정책 측면에서도 인플레이션에 저금리로 대응하는 비전통적 방식이 고수될 것으로 예상된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금리 인상을 ‘모든 악의 어머니’라고 묘사하며 80%가 넘는 물가 상승률에도 중앙은행에 오히려 금리를 낮추라고 압박해왔다. 이에 지난해 달러 대비 리라화 가치는 44%나 폭락했다. 이날 에르도안 대통령의 승리에 리라 환율은 장중 달러당 20.08리라까지 오르며(리라화 가치 하락) 20리라 선을 돌파해 사상 최저 수준에서 거래됐다. 블루베이애셋매니지먼트의 팀 애시 전략가는 “제한된 외환보유액과 큰 폭의 마이너스 실질금리가 리라화 가치를 짓누르고 있다”며 “현 체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도 “경상적자와 리라화 급락을 막기 위한 당국의 개입으로 외환보유액이 줄어들고 있는 게 특히 우려되는 점”이라고 짚었다. 지난해 말 750억 달러였던 튀르키예의 외환보유액은 최근 513억 달러까지 줄어들었다. 특히 5월 14일 기준 과거 6주간 95억 달러가 급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