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대만이 단교 44년 만에 양국 간 무역협정을 체결했다.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중국은 이번 협정이 대만 독립 세력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대만과의 경제 관계 설정 문제를 놓고 미중 간 갈등이 격화하는 가운데 싱가포르에서 개막한 아시아안보회의에서는 미중 양국의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 정책이 정면 충돌할 것으로 예상된다.
1일(이하 현지 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워싱턴DC에서 세라 비앙키 미국무역대표부(USTR) 부대표와 덩전중 대만 경제무역협상판공실(OTN)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21세기 무역에 관한 미·대만 이니셔티브’ 1차 협정 서명식이 개최됐다.
이번 협정은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포괄적 성격은 아니지만 미국이 1979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중국의 요구에 따라 대만과 국교를 단절한 후 맺은 첫 무역협정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양국이) 경제·무역 발전의 역사적 돌파구를 마련했다”고 강조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당초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한국·일본 등 13개국과 추진 중인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 대만을 포함시키려 했으나 중국의 반발이 예상되자 대만과 별도의 무역협정을 진행해왔다.
이번 1차 협정에는 세관 행정·무역 편리화, 양호한 법제 작업 등의 내용이 담겼는데 이보다 중요한 것은 대만이 미국으로부터 사실상 ‘국가’ 대우를 받았다는 점이다. USTR 부대표를 지낸 웬디 커틀러 아시아소사이어티 부회장은 “미국과 대만 경제 관계에서 중요한 이정표”라며 “그동안에는 실질적 약속을 담은 서면 합의를 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과 대만의 관계가 이처럼 깊어지면서 중국의 반발 수위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협정 직전 “중국의 수교국이 대만과 공식 협정을 체결하는 것에 결연히 반대한다”면서 “미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과 중미 3대 공동성명(수교 성명 등)의 규정 등을 위반했다”고 비판했다. 대만을 향해서도 “민진당 당국이 경제·무역 협력을 기치로 삼아 미국에 기대 독립을 도모하는 것은 헛수고가 될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주요국 안보 수장들이 모인 가운데 2일 싱가포르에서 개막한 아시아안보회의에서는 미중 양국이 안보 정책을 놓고 날 선 대립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 회의에서는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미국의 리더십’을, 리상푸 중국 국무위원 겸 국방부장이 ‘중국의 신안보 이니셔티브’를 주제로 연설할 계획이다. 리 부장이 대만 문제와 관련한 중국의 ‘레드라인’을 강조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오스틴 장관은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원칙을 재확인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회의를 계기로 두 장관의 회담 가능성이 거론됐으나 중국 측의 거부로 무산됐다.
한편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미국 콜로라도주 콜로라도스프링스에 있는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미국은 중국과의 갈등이나 대결을 추구하지 않는다”면서 “중국과 미국은 기후와 같은 글로벌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능한 한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우리는 치열한 경쟁에 대비하고 있다”며 “우리는 우리의 이익과 친구·가치를 옹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