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모어 띵(One more thing)’
5일(현지 시간) 애플 연례개발자회의(WWDC) 2023이 열린 미국 실리콘밸리 쿠퍼티노 애플 파크. 한 시간 반 가까이 진행된 기조 연설 끝에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무대 위로 다시 등장했다. 수천여명의 참가자들이 숨을 죽이고 이번 WWDC의 하이라이트가 될 순간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원 모어 띵’이라는 말이 나오자 환호성이 터졌다. 과거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가 커다란 발표를 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했던 문구에 자동으로 반응한 것이다. 2014년 WWDC에서 애플워치가 처음 공개된 이후 9년 만에 애플의 새로운 폼팩터 라인업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각도에 따라 다른 빛을 반사하는 둥근 형태의 고글 모양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박수가 터져 나왔다.
메타버스 기기 아닌 공간 컴퓨터 비전 프로
테크업계에서는 그간 애플이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을 아우르는 혼합현실(MR) 헤드셋을 출시할 것으로 관측해왔다. 하지만 쿡 CEO는 이날 헤드셋과 메타버스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새로운 AR 하드웨어 ‘비전 프로(Vision Pro)’를 소개했다. 쿡 CEO는 “AR은 디지털 콘텐츠를 실제 세계에 섞이도록 하는 고도의 딥 테크놀로지”라며 “새로운 혁명적인 제품과 함께 완전히 새로운 AR 플랫폼을 소개하게 돼 기쁘다”고 밝혔다.
애플은 이 새로운 기기를 애플이 최초로 구현한 삼차원(3D) 인터페이스를 기반으로 한 하드웨어 기기인 공간 컴퓨터(Spatial Computer)라고 소개했다. 이용자 시야에 있는 실제 세계가 인터페이스가 되고 그 위에 있는 앱과 사진, 영상 등 디지털 콘텐츠가 무한하게 펼쳐질 수 있는 구조라는 설명이다. 앨런 다이 애플 휴먼 인터페이스 부사장(VP)은 “화면 크기에 제약을 받지 않고 내가 보는 시야가 무한한 캔버스가 되어준다”며 “앱을 열 때마다 새로운 공간에 앱을 펼칠 수 있고 화면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설명했다. 애플의 블루투스 기기인 매직 키보드, 매직 마우스 등과도 호환이 가능하도록해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착용하는 컴퓨터에 가깝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전 프로의 운영체제(OS)는 비전OS로, 아이폰·아이패드 상에서 구동되는 앱들을 그대로 연동해 쓸 수 있고 동시에 외부 개발자들이 만든 앱 생태계까지 확장성을 높인다는 전략이다.
기존의 메타버스 기기와 달라진 점은 이용자가 다이얼 형태의 디지털 클라운을 통해 눈 앞의 환경에 대한 몰입도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이사이트(eyesight) 기술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용자가 몰입을 원할 경우 디스플레이 렌즈가 보라색빛으로 변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로 돌아오길 원할 경우 렌즈가 투명해지면서 다른 이들이 이용자들의 눈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기기를 착용한 채 콘텐츠를 시청하고 있다가도 누군가 다가오면 화면에 해당 인물의 형태가 나타나도록 해 현실 세계와 고립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소통 장치에 신경을 썼다는 설명이다.
멀티 터치 이은 애플 전매 특허 ‘제스처’
또 별도의 컨트롤러 없이 눈의 움직임, 손 동작, 음성만으로 완벽하게 제어가 가능하도록 했다. 특정 앱에 눈을 맞추는 순간 이 앱이 활성화되는가 하면 새로운 앱을 활성화하면 기존의 앱 화면이 사라지지 않고도 새로운 공간에 이를 띄울 수 있다. 특히 과하지 않은 손 동작으로도 자연스럽게 앱 사이즈를 조정하거나 다른 화면으로 넘길 수 있게 했다. 다이 애플 부사장은 “맥 마우스, 아이팟의 클릭 휠, 아이폰의 멀티터치를 이은 새로운 직관적인 모델을 디자인했다”고 강조했다.
시야의 해상도가 중요한 만큼 밝기와 해상도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마이크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기술을 활용해 2개의 디스플레이에 2300만 픽셀을 탑재했다. 애플 측은 “눈 하나당 4K 텔레비전을 넣는 것보다 많은 픽셀이 들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애플은 이번 비전 프로에도 자체 시스템온칩(SoC) M2를 탑재한 데 이어 새로운 AR 플랫폼을 위한 새로운 SoC를 개발해 100% 애플 실리콘 라인업을 구축했다. 특히 12개의 카메라와 5개의 센서를 비롯해 12개의 마이크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개발한 R1은 이미지나 영상이 지연(레이턴시) 없이 스트리밍 될 수 있도록 했다. 12밀리초 안에 새로운 이미지가 나타난다. 이는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시간보다 8배 빠른 속도라 이용자가 느끼는 레이턴시는 거의 없다는 설명이다.
457만원 소비자가 벽 넘을까
관건은 이용자들의 가격 탄력성이다. 애플 비전 프로 시작가는 3499달러(약 457만원)로 이전에 전망됐던 3000달러를 크게 상회한다. 애플 측은 “TV, 맥 등 애플 비전프로가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기기들을 합친 것보다 저렴한 가격에 만날 수 있다”고 언급했지만 반응은 엇갈린다. 이날 일본에서 온 참가자는 “예상보다 기기가 완성도 있게 출시됐다”며 “한 번쯤 도전해 볼만한 가격”이라고 언급했다. 로이터통신은 “메타가 출시한 전문가용 AR·VR 헤드셋인 퀘스트 프로 대비 3배 이상 높은 가격”이라며 소비자들이 부담을 느낄 가격대라고 짚었다. 비전 프로는 내년 초 출시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