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는 제약·바이오 산업이 얼마나 국민 건강과 안전을 위해 중요한지 모두가 뼈저리게 느끼는 계기가 됐을 겁니다. 사회안전망으로서나 국가 미래를 결정하는 핵심 산업으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정부와 산업계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하겠습니다.”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은 기나긴 코로나19 터널을 지나 엔데믹 국면으로 접어들던 올 3월 취임했다. 최근 서울 서초구 방배동 한국제약바이오협회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노 회장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국민들의 주목을 받은 제약·바이오 산업이 한 단계 더 도약해 글로벌 빅파마를 넘어설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데 기여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한국의 제약·바이오 산업은 미국·영국 등 선진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후발 주자다. 다만 풍부한 인적 자원과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역량, 정보기술(IT)을 보유한 만큼 경쟁국들을 추격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보유한 국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노 회장은 우리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혁신 신약을 개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한국제약바이오협회가 목소리를 내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 회장은 제약·바이오 산업의 발전을 위해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 “세상에 없던 신약을 만드는 ‘창조적 독점’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답했다. 창조적 독점이라는 개념은 페이팔 공동창업주인 피터 틸 팰런티어테크놀로지 회장이 쓴 ‘제로 투 원(ZERO to ONE)’에 나온다. 노 회장은 “진보는 1에서 N으로 증가하는 ‘수평적 진보’와 0에서 1을 만드는 수직적 진보가 있다”며 “수직적 진보란 기존에 없는 기술을 통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게 바로 창조적 독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제약 산업만큼 (이 개념을) 잘 설명해주는 곳은 없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제약·바이오 산업은 그동안 수평적 진보 중심이었지만 수직적 진보로 옮겨갈 동력을 갖췄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노 회장은 “한국은 양질의 제네릭 경쟁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를 수출함과 동시에 신약 개발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며 “이를 통해 개발하는 혁신 신약의 독점권은 경쟁 관계를 해치는 독점이 아니라 사회적 후생을 높이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이익을 제공하는 만큼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라고 강조했다.
제네릭 중심의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 구조를 폄훼하기보다 혁신 신약을 개발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설명이다. 의약품 생산 제반 시설이 충분하기 때문에 이 같은 수직적 진보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노 회장은 “제네릭을 신약 개발의 원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이 분야에 강점이 있는데 규제가 너무 강하게 들어가면 혁신적 신약 개발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2009년부터 시작된 개량 신약이나 지금 나오고 있는 바이오베터 등 기술 자본의 축적을 거쳐 ‘베스트 인 클래스(계열 내 최고의 약)’와 ‘퍼스트 인 클래스(타깃에 대한 최초의 약물)’ 신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노 회장은 한국의 제약·바이오 산업이 후발 주자를 넘어 선도 그룹에 진입하려면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제약·바이오 분야는 기업들 스스로 제품에 대한 가격을 결정할 수 없다. 신약 개발에 성공해도 정부가 약 값을 결정한다. 어떤 산업 영역보다도 정부 규제가 강한 산업이다. 그는 “혁신적 신약을 만들어낼 것이냐는 지금부터 정부와 산업계가 힘을 합쳐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신약 개발을 독려하기 위해 적정한 약가를 인정해야 할 필요성도 언급했다. 그는 “신약에 대한 가치는 적어도 인정을 해줘야 한다”며 “정부에서도 신약의 가치를 인정해주겠다는 이런 얘기를 해야 하고 노력하는 기업이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제네릭 약가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노 회장은 “제네릭이라고 해서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산업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며 “제네릭은 제네릭대로 개량 신약은 개량 신약에 맞게 합당한 가치를 책정해야 건전한 생태계를 만들고 연구개발(R&D)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 회장은 최근 한국의 제약·바이오 산업이 도약을 위한 변화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기업들이 해외 바이오 기업을 인수하는 등 과거에는 볼 수 없는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해외 바이오테크와 적극적인 인수합병(M&A), 오픈이노베이션 등에 나서고 있다.
오픈이노베이션을 통한 기술수출 등이 활발해지면서 협회도 적극 지원하고 있다. 협회는 전문 사업개발(Business Development·BD) 교육도 지원하고 있다. BD 직무는 회사의 성장을 견인할 신제품을 도입하거나 파트너십을 주도한다. 글로벌 진출 활성화와 기술이전 등에 대한 BD 전문 인력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협회 측은 이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한국 바이오 산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혁신 신약 개발이라는 ‘담대한 도전’이 불가능한 목표인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실제 한국은 글로벌 생명과학 기업 싸이티바와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가 공동으로 조사한 ‘2021 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 회복지수’에서 전 세계 7위, 아시아 국가 중 1위를 차지했다. 이번 조사는 20개국 1165명의 제약·바이오 산업 관계자를 대상으로 이뤄졌다. 팬데믹 이후 한국이 빠른 속도로 정상화할 수 있다는 분석이 골자다. 전문가들은 팬데믹 기간 동안 규제 기관과 산업계가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허가 과정을 단축시킨 점을 높게 평가했다.
최근 한일 간 경제 협력의 물꼬가 트이며 제약·바이오 산업 분야에서도 양국 간 협력이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에는 다국적 제약사인 다케다제약과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을 마친 시오노기제약이 있다. 하지만 바이오벤처 생태계는 아직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일본이 한국 바이오 산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양국 간 이뤄질 협력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노 회장은 “곳곳에서 긍정적인 추세들이 나타나고 있다”며 “최근 바이오벤처 회사들도 급격하게 늘고 있고 신약 후보 물질들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물론 모든 후보 물질들이 신약이 되지는 않겠지만 뭔가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기운들이 나타나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노 회장은 또 신약 개발 생태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인공지능(AI)의 활용도가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약의 R&D에 소요되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은 국내 기업들에는 넘기 힘든 진입 장벽이다. 짧게는 10년부터 길게는 20년까지 소요되는 장기간의 ‘데스밸리’다. AI는 R&D 효율성을 극대화해주는 만큼 신약 개발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미래 핵심 기술로 부상하고 있다. AI를 이용한 후보 물질 설계부터 유전체 등 생체 정보 데이터를 기반으로 동물실험과 임상시험을 설계하고 최적의 환자군을 도출해 불확실성과 시간·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서도 AI를 활용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노 회장은 “현재 AI를 활용한 파이프라인이 105개 정도 된다”며 “한국은 정보기술(IT)이나 데이터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이기 때문에 AI를 잘 활용하면 개발 과정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 회장은 변화에 대한 발 빠른 대응을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의 강점으로 꼽았다. 보수적인 경영을 할 수밖에 없던 초대 창업자에서 오너 2·3세로 경영진이 바뀌면서 신약 개발 등 보다 과감한 도전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다고 봤다. 시장에서도 신약 보유 여부를 핵심 경쟁력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비전을 갖고 목표를 가질 때 주변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한다면 창조적인 독점으로 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합성의약품 중심에서 세포·유전자치료제(CGT), 항체약물접합체(ADC), 이중항체, 마이크로바이옴(장내 미생물) 등 차세대 의약품 모달리티에 적극 도전하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노 회장은 “합성의약품 분야는 다국적 제약사 등이 이미 선점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약을 개발하는 방법에 있어 기존 케미컬로 안 되는 분야에서는 새로운 모달리티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래지향적 분야인 만큼 그런 쪽으로 노력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새 분야이기 때문에 우리 기업들과 빅파마 간 격차는 크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임기를 마치기 전까지 세계 6대 제약·바이오 강국 도약이라는 목표를 현실로 만들어가고 싶다는 포부를 나타냈다. 노 회장은 “제약·바이오 산업은 제약 주권을 확립함과 동시에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가 달려 있다”며 “이에 기반한 제약·바이오 강국으로의 도약이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의 지향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제약 강국 실현으로 국민 건강과 국가 경제 선도’가 비전이고, 제약 주권 확립과 오픈이노베이션 생태계 구축이 협회의 사업 목표”라며 “정부의 계획이 실현될 수 있도록 산업계 차원의 분투와 혁신을 경주하는 것이 협회의 역할이자 협회장의 책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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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경기 파주 △경동고 △한국외대 러시아어학과 △1983년 제27회 행정고시 합격 △1993년 영국 요크대 석사 △2005년 복지부 보건의료정책본부장 △2008년 대통령실 보건복지비서관 △2010년 식품의약품안전청장 △2011년 대통령실 고용복지수석비서관 △2017년 심평원 약제급여평가위원회 위원장 △2023년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