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계단을 아시나요

[가지가지로 세상읽기]<3>
■김관숙 선거연수원 초빙교수
전쟁 피난민의 상봉 장소이자
구호물자를 사고팔던 시장
피난민의 고단한 시절을 담은 곳


부산 강의 후 기차 시간이 여유 있다는 핑계로 동광동 벽화골목을 돌았다. 자칭 ‘고난의 행군’이라 부르는 지방 강의 때 가끔 누리는 틈새 관광인 셈이다. 유명한 감천마을이 하늘과 바다를 한껏 안은 이국적인 촌길 같다면, 이곳은 사람과 집을 품고 있는 도시 골목길이다. 경남 마산의 창동예술촌 마냥 쇠락하는 중구지역을 살리자는 취지로 2011년부터 열고 있는 ‘거리미술제’로 탄생한 소박한 작품들이란다.


인근 광복동 뒷골목 ‘쌈지골목’은 40계단 주변 인쇄골목에서부터 남성초등학교로 이어지는 구간에 근대문화유산 부산기상관측소가 자리한 까닭에 ‘천·지·인(天·紙·人)’이 주제라고 한다. 1960년대 형성된 인쇄골목은 꼭 서울 충무로의 광고 골목 같은 느낌이다. 골목 초입에 김성환 화백의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을 형상화한 '동광동 고바우'가 반긴다. 골목골목 폐가 철문과 담장을 이용해 책장을 담아내고, 담벼락에 건반을 붙여놓거나, 담장·배수관·계단 등 지형지물을 이용해 재미난 작품들을 잘도 만들어 놓았다.


‘40계단 문화관광 테마거리’로 조성된 이 골목의 시작점인 40계단은 원래는 25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1953년 옛 ‘부산역전 대화재’ 이후 폐허가 되며 폭이 너무 줄어 옛 모습을 잃어버린지라 20여 미터 떨어진 지금의 위치에 40계단을 만들고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호기심이 동해 계단을 세어 보니 정말 딱 40개다. 계단 윗쪽으로 동광동 주민센터로 연결되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오르면 40계단 문화관이 있다. 40계단은 이명세 감독, 안성기·박중훈·장동건 주연의 십수 년 전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도 유명해진 곳이다. 영화 초반부에 버버리 코트 차림의 냉혹한 킬러 안성기가 등장하는데, 노란 은행잎을 배경으로 비가 쏟아지는 계단 장면에서 흘러나왔던 비지스의 ‘홀리데이(holiday)’가 묘하게 어울렸더랬지. 이 감독 특유의 멋진 색감과 만화영화 같은 영상기법이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등장하는 박중훈과 안성기의 슬로모션 결투신은 매트릭스를 비롯해 이후 여러 작품에서 패러디된 명장면이다. 사실 40계단은 노래로 더 유명하다. 지금 세대엔 낯선 ‘경상도 아가씨’다. 어릴 적 친정 아버지가 흥얼거리셨던 곡조라 내 귀에도 꽤나 익숙하다.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스런 동정하는 판자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우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6.25 때 피란민들의 고통과 애환을 달래준 노래가 특히 많은데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이 대표적이다. 대중가요는 예나 이제나 그 시대를 절절하게 담는다.


‘크리스마스의 선물’로 불리는 흥남철수로 10만여 피란민들까지 몰려드는 바람에 부산의 그해 겨울은 결코 따뜻하지 않았다. 당시 피란민들은 헤어질 때 무작정 "부산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외쳤다지. 그런 까닭에 영도다리와 가까운 40계단은 판자촌으로 올라가는 길로, 부두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팔고 사는 시장으로, 또 헤어진 가족들의 상봉장소로도 이름을 날렸다. 지금도 유명한 국제시장, 깡통시장은 당시 피란민들의 눈물이 오롯이 녹아있는 삶의 터전이었다.


우리의 교육열이야 지금도 유명하지만, 전쟁통에서도 피란학교는 성황을 이뤘다고. 전쟁 중에도 배움만은 포기못했다며 우리 어머님이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어디서든 펼쳐졌다는 '천막 아래 학교‘ 풍경이 그려진다. 지금 40계단 주변길엔 젖먹이 아기를 업은 여인, 물지게를 진 소녀, 뻥튀기 할아버지, 아코디언을 켜는 악사 등 조각상들이 고단한 그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40계단은 개항기 이후 전쟁의 상흔을 겪은 임시 수도까지 부산의 영욕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내친김에 부산 근현대 역사 박물관과 보수동 책방골목을 지나 자갈치 시장까지 걷고 있자니, 이게 바로 가성비 갑인 ‘짧은 한나절 긴 역사 기행’이렸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