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간호법안이 폐기된지 한 달여가 지났지만, 보건의료계 혼란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대한간호협회가 26일 간호사 4만 3000여 명의 면허증을 반납하고 불법 의료행위를 지시한 병원 81곳을 신고하는 등 반발 수위를 높여가고 있지만, 보건복지부는 사과 대신 유감을 표명하며 평행선 대치를 이어갔다.
간협은 이날 오전 복지부를 항의 방문해 전국에서 모인 간호사 4만3021명의 면허증 사본을 복지부에 반납했다. 간호법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함으로써 간호법의 가치를 훼손한 데 대해 전국 회원들의 항의 의사를 표명하고, '중립성 유지'를 촉구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대리처방, 채혈, 대리기록, 동맥혈 채혈 등 간호사 면허 범위에 해당하지 않는 불법진료 행위가 일선 의료기관에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 것도 궁극적으로 복지부의 책임이 크다고 봤다. 간호사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해야 할 책무를 저버린 채 불법진료 행위를 묵인하고 있다는 이유다.
간호사 준법투쟁 태스크포스(TF)를 이끌고 있는 탁영란 간협 제1부회장은 이날 복지부 항의방문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간호법 제정 과정에서 복지부가 보여준 행태가 과연 국민의 건강 보호를 위한 것이었는지 묻고 싶다"며 “병원협회와 의사협회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복지부의 행태는 국가 보건의료 정책을 책임지는 조직이 맞는지를 의심케 한다"고 비판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을 향해서는 "간호법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의료현장에 만연돼 있는 불법 의료행위를 묵인한 채 직무를 유기했다"며 "진정성 있는 사과와 함께 이제라도 간호사의 업무범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즉각 나서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간협은 지난 5월 간호법 제정이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무산된 뒤 항의 표시로 준법투쟁을 선언했다. 의료법에 명시된 업무범위가 아닌 데도 병원 간호사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불법진료행위에 대한 신고를 받고, 이를 공론화 하겠다는 것이다. 의사 역할을 일부 대신하는 진료보조(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 업무도 신고 대상이었다.
간협은 이날 복지부 방문 이후 국민권익위원회를 찾아 간호사에게 불법진료 행위를 강요한 것으로 신고접수가 들어온 의료기관 81곳을 국민신문고에 신고했다. 지난 23일까지 간협에 접수된 1만 4504곳의 신고 중 실명 확인 작업을 거쳐 1차로 추려진 명단이다. 간호사에서 불법진료행위를 지시하고 거부 시 폭언, 위력에 의한 직장내 괴롭힘 등으로 의료법과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혐의가 확인된 공공 27곳, 민간 54곳이 함께 명시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복지부는 간호법 폐기 과정에서 해명할 만한 사항이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간협이 PA 간호사 문제를 간호법안 폐기와 결부시켜 단체행동의 수단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유감스럽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복지부는 이날 오전 보도자료를 내고 "폐기된 간호법안의 간호사 업무 범위는 현행 의료법의 내용과 동일해 PA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다"며 "의료법상 의료인이 자발적으로 면허증을 반납할 수 있는 근거나 정부가 이를 접수할 수 있는 근거는 없기 때문에 (간협의 간호사 면허증 반납은) 법률적으로 효력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PA 간호사는 의료현장에서 임상전담간호사(CPN)로도 불린다. 흉부외과와 같이 주로 전공의(레지던트)들의 기피현상이 심해 의사인력이 부족한 진료과에서 봉합, 절개, 처방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문제는 국내 의료법상 PA 또는 CPN 면허가 존재하지 않다보니 의사 면허가 없는 사람이 의료행위를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불법의 소지를 안고 있으며, 의료사고가 나도 보호를 받을 수도 없다는 점이다. 일각에선 PA 간호사에 대한 법적 근거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복지부는 간호법과 별개로 이달부터 간협을 포함한 관련 보건의료단체, 환자단체 등과 함께 협의체를 구성해 PA 제도 개선방안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복지부는 "현행 의료법 체계에서 환자 안전을 강화하고, 서비스 질을 향상시키는 한편, 팀 단위 서비스 제공 체계를 정립하고 책임소재 명확화를 위한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라며 "간협은 단체행동을 하기 보다 협의체에 참여해 PA 문제 해결 방안을 함께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