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권사들이 앞다퉈 탄소배출권 관련 전담 부서를 신설하며 기업들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개선) 경영을 지원하고 나섰다. 이들은 각 국가와 기업들이 글로벌 기후위기에 대응 수위를 점점 높여 나가면서 해당 시장을 빠르게 키울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27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금융 당국에 ‘자발적 탄소배출권에 대한 자기 매매 및 장외거래 중개 업무’를 부수 업무로 보고한 증권사는 총 8곳이다. 지난해 3월 하나증권이 처음 보고한 이후 4월 한국투자증권, 7월 KB·SK·NH투자증권(005940), 8월 신한투자·미래에셋증권, 11월 삼성증권(016360)이 연이어 이름을 올렸다. 탄소배출권 시장은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강제로 부과하는 ‘규제적 시장’과 기업·기관·비정부기구(NGO) 등이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자발적 시장’으로 나뉜다.
증권사 8곳이 뛰어든 시장은 후자다. 시장조사 업체 QY리서치는 전세계 자발적 탄소배출권 거래 시장 규모가 2022년 14억 4400만 달러에서 2029년 53억 5800만 달러로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기간 연 평균 성장률은 20.9%에 달한다.
증권사들은 정부 주도의 기업 간 탄소배출권 거래 시장 조성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실제로 환경부는 지난해 12월 탄소배출권 시장 조성자로 한국산업은행·중소기업은행·하나증권·한국투자증권·SK증권(001510) 등 기존 사업자 5곳에 KB증권·신한투자증권 등 2곳을 추가했다. 이에 따라 하나·한국투자·SK·KB·신한투자증권 등 증권사 5곳은 올 해 탄소배출권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있다.
이들은 매일 매도·매수 주문을 제시해 시장에 자금을 대고 탄소배출권 가격이 등락을 거듭할 때 변동성을 완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거래량이 적고 가격 변동성이 커 기업에 부담을 주는 초기 시장에 구원 투수로 나선 셈이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도 지난 4월 ‘ESG 금융 추진단 2차 회의’에서 "증권사의 시장 참여 확대, 파생상품 도입 등을 통해 탄소배출권 시장에 충분한 유동성이 공급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ESG 사업이 국내 기업 경쟁력 강화와 미래 먹거리 창출의 원천으로 떠오르자 각 증권사들은 조직 확충 등 사업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가장 앞서 나간다는 평가를 받는 곳은 하나증권이다. 하나증권은 2021년 탄소배출권 시장조성자, 지난해 자발적 매매 중개 업무에 업계 최초로 진입했다.
지난해 4월에는 방글라데시 6개 주에 태양광 정수시설 123대를 보급하고 탄소배출권 94만 톤을 확보했다. 12월에는 싱가포르 탄소배출권 거래소(CIX)와 자발적 탄소배출권 시장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MOU)를, 올 4월에는 SK온·하나대체투자자산운용과 2차전지 산업 생태계 구축·확장을 위해 MOU를 각각 맺었다.
KB증권은 지난해 7월 FICC 운용 본부 안에 탄소·에너지 금융팀을 신설했다. 올 1월에는 경기 용인 연수원과 울산 남울산사옥에 연간 총 16만 킬로와트시(kWh) 용량의 태양광 발전 시설도 구축하고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연 20톤 정도의 이산화탄소를 감축할 수 있는 시설이다. 이달에는 용인 연수원에서 다회용 컵 사용 유도 캠페인을 펼치기 시작했다.
NH투자증권도 지난해 이사회 산하에 ESG 위원회를 설치하고 올 초 운용사업부 내에 탄소금융팀을 새로 만들었다. 2월에는 바이오차 생산 벤처인 4EN(포이엔)과 온실가스 감축 사업에 투자하는 계약도 체결했다. 바이오차는 유기물과 숯의 중간 성질을 갖는 친환경 소재다.
SK증권은 4월 ESG부문 산하 기후금융팀을 본부로 승격하고 ESG금융본부도 새로 뒀다. 5월에는 단일 증권사로는 최초로 글로벌 금융기관 탄소 배출량 측정 이니셔티브인 ‘탄소회계금융연합체(PCAF)’와 유엔환경계획 금융 이니셔티브(UNEP FI)에 가입했다. SK증권은 지난해 12월 업계 최초로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 공개 협의체(TCFD)’ 보고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미래에셋증권은 지배구조 부문에서 돋보이는 ESG 경영 실적을 쌓고 있다. 미래에셋증권은 2월 ESG 경영 강화 차원에서 총 2100억 원 규모의 현금 배당과 자사주 1000만 주 소각을 결정했다. 미래에셋증권은 최근 3년간 약 6600억 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해 3300억 원어치를 소각한 바 있다. 4월 서울 이촌한강공원 일대에서 ESG 환경캠페인인 ‘미래에셋증권 숲 가꾸기’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치고 이달 ESG 경영 성과를 수록한 통합 보고서도 발간했다. 미래에셋증권은 이 같은 활동에 힘입어 지난해 말 ‘다우존스 지속가능경영 월드 지수(DJSI World)’에 11년 연속 편입됐다. 한국ESG평가원이 내놓은 증권사 평가에서는 삼성·현대차증권과 함께 A등급을 획득했고 서스틴베스트의 평가에서는 한화투자증권과 함께 최고등급인 AA등급을 받았다.
삼성증권은 미래에셋증권과 함께 지난해 다우존스 지속가능경영 월드 지수에 편입됐는데 2020년 업계 최초로 리서치센터 안에 ESG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업계 첫 ESG등급 인증 채권을 발행했다.
한국투자증권은 올 해를 ‘ESG 경영 전환의 해’로 선언한 모회사 한국투자금융지주와 손발을 맞추고 있다. 4월부터는 강원도에 ‘한국투자 숲’을 조성하기로 하고 정일문 사장과 임직원들이 직접 쉬나무 1500그루를 심었다. 증권 업계의 한 관계자는 “탄소배출권 등 ESG 관련 사업이 아직 수익에 큰 보탬은 되지 않지만 미래에는 주요 사업으로 떠오를 잠재력이 크다”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