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1년 카르멜수도회는 새로 건립된 산타마리아델라스칼라 성당의 대형 제단화를 카라바조에게 맡겼다. 주제는 ‘성모의 영면’이었고 특별히 엄했던 카르멜수도회의 영성(靈性)을 반영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성모의 죽음’이 공개되자 수도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빛과 어둠의 격한 대조 안에서 성모는 거룩함의 어떤 자취도 찾아볼 수 없는, 축 늘어진 시신 이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불룩하게 솟아오른 하복부로 봐 임신 중에 숨을 거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카라바조가 임신한 채 익사한 게다가 생전에 자신의 연인이었던 매춘부의 시신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보다 더한 신성모독은 일찍이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근대 이후의 사가들에게 ‘성모의 죽음’은 성(聖)과 속(俗), 성모와 매춘부 사이의 수직적 위계를 일거에 폐기하고 미적 민주주의의 여명을 밝힌 역사적 쾌거로 간주됐다.
카라바조의 인생도 사고의 연속이었다. 동성애 이력에다 거리에서의 폭행과 상해는 일상사였다. 도박에 살인까지 겹쳐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했고 난투 끝에 경찰을 죽이는 일까지 일어났다. 1606년 5월에는 도박을 하던 중 상대를 단검으로 찔러 죽였다. 38세의 카라바조는 죄질이 나쁜 탈옥수에 수배자 신세였다. 나폴리·몰타·시칠리아를 배회하는 동안 몸은 병들고 쇠약해졌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묘하게도 ‘성모의 죽음’의 모델로 삼았던 여인의 것과 닮아 있었다. 그의 시신은 해변에서 발견됐다. 군대나 경찰에 체포돼 처형됐거나 부랑자에게 살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예술이 재해석된 것처럼 그의 인생이라는 원본도 그럴 수 있을까. 게다가 해석은 어디까지나 해석일 뿐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