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신약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가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돌연변이 양성 비소세포폐암 1차치료제로 적응증을 넓히면서 올 상반기 피날레를 장식했다. 동일 기전의 '타그리소(성분명 오시머티닙)'는 지난 2018년 12월 폐암 1차치료제로 허가를 받았지만 아직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지 않고 있다. 2차치료제보다 3배 가량 규모가 큰 국내 폐암 1차치료제 시장을 놓고 하반기 아스트라제네카와 유한양행(000100)의 패권 경쟁이 본격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30일 렉라자의 적응증을 비소세포폐암 환자의 1차 치료에 사용하도록 확대했다고 밝혔다. 렉라자는 폐암 세포의 성장에 관여하는 EGFR 수용체의 신호전달을 방해해 폐암 세포의 증식과 성장을 억제하는 표적항암제다. 지난 2021년 1월 EGFR T790M 변이가 발생한 국소진행성 또는 전이성 비소세포폐암의 2차치료에 사용하도록 허가를 받으며 국산 신약 31호로 이름을 올렸다.
항암제는 환자에게 처방되는 순서에 따라 1~3차 치료제로 나뉜다. 약물치료 전력이 없는 암환자에게 가장 먼저 처방되는 경우를 1차치료제로, 1차치료에 실패했을 때 다음 옵션으로 고려되는 경우를 2차, 3차 등으로 구분한다. 렉라자는 '이레사(성분명 게피티닙)', '타쎄바(성분명 엘로티닙)', '지오트립'(성분명 아파티닙) 등 먼저 개발된 EGFR 티로신키나제억제제(TKI)를 복용하다 T790M 내성이 생긴 환자에게 2번째 옵션으로 투여되고 있다.
유한양행은 지난해 10월 EGFR 활성 돌연변이 양성 비소세포폐암 환자 대상으로 렉라자의 1차치료제 가능성을 평가한 LASER 301 임상 3상 시험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무진행생존기간 개선을 확인했다. 무진행 생존기간은 항암제 투여 후 종양 크기가 커지는 등 질병이 진행되지 않거나 사망에 이르지 않는 기간을 말한다. 당시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공개된 LASER 301 연구 결과에 따르면 렉라자 복용군의 무진행 생존기간 중앙값(mPFS)은 20.6개월로, 이레사의 9.7개월보다 11개월가량 연장됐다. 유한양행은 올해 3월 이 같은 데이터를 토대로 식약처에 렉라자의 적응증 추가를 신청했다. 3개월 여 만에 식약처 승인을 받으며 처방 가능한 환자 규모가 대폭 넓어진 것이다.
EGFR 돌연변이는 환자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중에서도 시장 규모가 가장 크다.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는 미국, 유럽 등 주요 국가에서 유일한 EGFR 비소세포폐암 1차치료제로 허가를 받은 후 7조 원(2022년 글로벌 매출 50억 달러)에 육박하는 매출을 올렸다. 1세대 약물인 이레사, 타쎄바에 이어 이들 약물의 내성에 대비한 4세대 신약 개발에 수많은 기업들이 뛰어드는 것도 그러한 시장성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EGFR 비소세포폐암 1차치료제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지 않았다. 렉라자와 함께 3세대 약물로 구분되는 타그리소가 2018년 12월 EGFR 돌연변이 비소세포폐암 1차치료제로 허가를 받았지만, 번번이 급여등재 시도가 불발되면서 4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급여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국내에선 여전히 EGFR 변이 양성 비소세포폐암으로 진단될 경우 이레사, 타쎄바, 지오트립 등 1,2세대 약물이 1차치료제로 처방된다.
업계에서는 3세대 약물이 급여 등재에 성공할 경우 국내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시장이 종전보다 3배가량 커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의약품 시장조사기관 아이큐비아에 따르면 이레사, 타쎄바, 지오트립, 타그리소, 렉라자 등 EGFR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5종은 지난해 약 166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 중 타그리소 단일 품목이 1065억 원으로 3분의 1가량을 차지하고, 후발주자인 렉라자가 빠른 속도로 추격하는 구도다. 3세대 약물이 1차치료제로 급여 등재될 경우 시장 규모가 단숨에 3000억 원 이상 규모로 커질 수 있다.
다만 경쟁관계인 두 약물 중 하나가 비소세포폐암 1차치료제로 먼저 급여등재되는지 여부에 따라 시장 판도는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타그리소는 올해 3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암질환심의위원회를 통과하면서 5차례 시도 만에 급여등재 첫 관문을 넘었다. 다만 여전히 심평원 약제급여평가위원회를 비롯해 건강보험공단과의 약가 협상,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등의 절차가 남아있다. 일각에서 이달 초 약평위에서 타그리소의 급여확대안이 통과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됐지만 상정 자체가 불발됐다. 유한양행 입장에선 경쟁약물의 급여 등재 절차가 주춤해진 만큼 원점에서 승부수를 띄울 여력이 생긴 셈이다.
실제 유한양행은 렉라자의 2차치료제 적응증을 허가받은 후 6개월 만에 급여 등재된 전력이 있다. 경쟁약물인 타그리소가 2016년 5월 허가를 받은 후 다음해 12월 급여를 적용 받기까지 1년 7개월이 걸렸던 것과 크게 대비된다. 영국 본사의 지침에 따라 정부와 약가협상을 벌여야 하는 아스트라제네카와 달리, 국내 기업인 유한양행은 상대적으로 보험상한가를 책정할 때 유연한 측면이 있다. 정부 입장에서도 국산 신약 렉라자가 1차치료제로 허가를 받으면서 타그리소가 유일한 옵션일 때보다 강도높은 약가인하를 요구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타그리소는 이미 미국, 유럽 등 해외 여러 국가에서 판매 중이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서도 약가인하 여력이 적을 수 밖에 없다"며 "정부가 건강보험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상대적으로 약가가 저렴한 렉라자의 급여 등재를 먼저 고려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