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입니까? 제가 생각한 것과 반대여서 의외네요.”
얼마 전 기자와 만난 일본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국의 반도체 공장 설립 현황을 묻다가 고개를 갸웃댔다. 120조 원을 들여 조성하는 SK하이닉스(000660)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부지를 선정한 지 4년이 다 되도록 첫 삽을 뜨지 못했고, 삼성전자(005930)가 300조 원을 투자하는 용인 첨단 시스템반도체 단지도 물과 전력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답변을 들은 후의 반응이었다. 본인이 생각하는 ‘한국 반도체’의 이미지와 너무 다른 현상이라고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80~1990년대 한국 반도체는 ‘빨리빨리’의 대명사였다.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한 삼성전자는 반도체 공장 설계와 건설을 동시에 진행해 6개월 만에 기흥 단지를 꾸렸다. 미국·일본 기업과 10년 이상 벌어졌던 기술 격차를 단숨에 좁힌 일화 역시 전설로 남아 있다. 반면 일본은 1990년대 저가 D램 시장이 커진 상황에서도 고비용·고품질 구조를 놓지 못했고 신규 장비 반입에 대한 의사 결정에도 소극적이었다. 시장에 먼저 뛰어든 삼성전자가 수요를 선점하는 광경이 반복됐고 결국 2000년대 일본 반도체 산업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상황이 반대로 가고 있는 듯하다. TSMC가 지난해 4월부터 일본 구마모토에 짓고 있는 파운드리 공장은 올해 하반기 준공을 앞뒀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강화 정책하에 공사 기간은 4~5년에서 1년 반까지 줄었다. 세금 혜택 등을 고려하면 정부에서 ‘공장을 거의 지어주는 수준’이라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한국 반도체가 환경영향평가, 토지 보상, 공업용수 인허가 등에 겹겹이 발목이 잡히는 동안 일본은 자국 반도체 산업 강화를 위해 완벽주의 문화를 버리고 속도전에 나선 셈이다. 반도체 산업사에 비춰보면 위기감을 가져도 될 대목이다.
그나마 최근 정부의 긴급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삼성전자 첨단 시스템반도체 단지 조성에 총력 지원을 약속했고 완공 시점도 예정보다 2년 앞당긴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글로벌 반도체 경쟁이 하루가 다르게 치열해지는 상황이다. 공장을 거의 지어주는 수준까지는 못 된다 해도 업계의 목소리를 새겨듣고 장애물을 치워주는 정도는 해야 한다. 보여주기식 대화가 아닌 실리 있는 해결책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