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분단 후 첫 합의였지만…유엔가입 추진에 北 대화 끊어

[7·4선언 '막전막후' 1700쪽 공개]
北 성명 후 '미군 철수' 노골화에
박정희 정부는 비정치분야 접근
국제무대로 남북 문제 옮기려하자
북한은 "민족분열적 책동" 비난
朴 대통령 저격 미수 뒤 관계 악화

7·4남북공동성명 문서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의 서명이 담겨 있다. 연합뉴스

북한이 7·4남북공동성명 발표 1년여 만에 남북대화를 일방적으로 중단했던 과정이 남북 당국자 간 대화록을 통해 공개됐다. 1972년 당시 남측은 부정적인 내부 분위기에서도 북측과의 평화통일을 목표로 한 접촉을 이어갔다. 하지만 북한은 공동성명을 발표한 후 김종필 당시 총리가 공동성명을 무력화하려 한다며 불만을 표출하고 6·23선언을 비판하는 등 남북회담은 잦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통일부가 6일 공개한 1700쪽 분량의 남북회담사료에 따르면 북측은 공동성명 발표 9일 만인 1972년 7월 13일 열린 실무 접촉에서 “우리가 보도나 라디오를 통하여 보면 그쪽에서 김종필 총리가 가장 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김 총리가 공동성명을 무력화하는 쪽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남측의 진의를 따져 물었다. 당시 김 총리가 공동성명 발표 직후 국회에서 “이 몇 장의 성명에 우리의 운명을 점칠 수 없으며 또 (북한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 간 대화 분위기가 반전되기까지는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대북 정책에 있어 억지력이 없는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북측은 공동성명 이후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회의 등에서 툭하면 “외세를 배제해야 한다”며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고 나섰다. 남한은 이념 차이로 인한 마찰 요인이 적은 비정치 분야부터 시작해 정치·군사 분야로 협력 범위를 넓혀가는 보텀업(상향식) 방식의 협력을 원했지만 북한의 의도는 미군 철수 등에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북한은 이후 1973년 8월 28일 중앙정보부의 ‘김대중 납치 사건’을 빌미 삼아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를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이유였고 진짜 이유는 그해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의 평화통일외교정책 선언 때문으로 분석됐다. 박 대통령은 남북한이 각각 유엔 가입을 추진하며 북한의 유엔 기구 가입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6·23선언을 통해 북한 문제를 국제 무대로 옮기고자 했지만 북한은 “가장 노골적인 민족 분열적 책동”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다 1974년 광복절 박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으로 불신이 고조되며 회담 분위기는 막말이 오가는 등 최악으로 치달았다. 남북회담을 주도해온 이후락 부장의 호칭도 ‘이 부장 선생’에서 하루아침에 ‘두목’ ‘민주주의의 교형리(絞刑吏·사형집행관)’ ‘사람잡이를 일삼던 자’ ‘상습적인 배신자’로 바뀌었다.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회의는 얼마 지나지 않은 1975년 3월 10차를 끝으로 더는 열리지 않았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