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관계가 또 한 번의 중대한 고비를 맞았다. 양국은 1992년 ‘북한’이라는 이질적 요소를 두고 국교 정상화를 통해 40여 년에 걸친 반목 관계를 청산했다. 경제가 정치를 압도하는 교류 분위기에서 양국은 1차적으로 사드 배치 때문에 갈등을 겪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미중 갈등에서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나라는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며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한국은 싱 대사의 이번 발언을 두고 한국 외교 노선에 대한 내정간섭이며 야당 대표를 초청한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입장문을 발표한 것은 국내 정치 개입 시도라고 분개했다. 중국은 특히 한국 외교부를 패싱하면서 준비한 입장문을 국내 언론에 보도자료로 제공하고 주한 대사관 홈페이지에 전문을 게재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내용 면에서는 싱 대사의 개인적 의견이 일부 가미된 부분도 있겠으나 전체적으로는 분명히 한국의 대미 경사나 한미일 삼각 공조 강화를 우려하는 중국 정부의 의중이 반영된 행동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빈 협약에 따라 국제규범화된 ‘주재국과의 우호 협력 증진’을 도모해야 할 외교사절의 언행으로 부적절하다고 판단한다. 그런 만큼 싱 대사의 거취 정리를 의미하는 ‘적절한 처리’를 요구하고 있다. 중국은 ‘외교관의 정상적 책무 범위’에 속하는 일이라며 한국의 요구를 반박했다. 중국으로서는 대사의 잘못을 인정하자니 자국의 대(對)한국 정책 기조를 부정하는 꼴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고 개인의 일탈로 인정하자니 그동안 한국에서의 활동이 결국 한국 정치에 개입하려는 시도였음을 자인하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다. 다행히 양국 외교부 차관급이 4일 베이징에서 전격 회동해 대화의 물꼬는 텄다.
주지하다시피 한중 관계는 다양한 외부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중국은 북핵·미사일 고도화에 맞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확보를 위해 한미 동맹을 포괄적 가치 동맹으로 강화하고 한미일 삼각 협력을 공고히 하려는 윤석열 정부의 대외 전략을 가장 크게 우려한다. 중국은 한미 동맹과 한미일 공조 강화가 결국 대중 압박을 위한 미국의 전략이며 한국이 이에 앞장서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저지하지 않으면 중국의 대외 전략 추진에 장애가 생긴다고 판단해 한국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것이다.
특히 중국은 4월 한미정상회담에서 핵협의그룹(NCG)을 창설해 북핵에 공동 대응한다는 ‘워싱턴 선언’과 ‘대만해협의 안정과 평화 유지’를 언급한 데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또 한미일이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북한의 미사일 정보 공유에 합의하고 올 5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계기로 확대된 공조를 약속하자 우려는 더 커지고 있다. 여기에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도 5월 27일 중국 배제를 염두에 둔 공급망협의위원회 결성에 성공하고 한국이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이 되자 더욱 조급해졌다.
이번 사태는 지난 1년간 윤 정부의 대외 전략을 관망하고 관리하는 정책을 폈던 중국이 한국의 움직임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압박 기조로 대응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중국이 시진핑 체제 이후 견지해온 ‘전랑 외교’를 한층 더 강화하고 공격성을 높인 행태를 한국에 투사하는 여론전과 심리전을 본격화한 것이기도 하다.
윤 정부는 보편적 가치와 규범에 기반해 국제사회의 자유·평화·번영을 추구하는 것이 한국 정부의 외교 목표임을 천명해왔다. 특히 대중 관계는 일방적 존중을 강요하는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상호 존중을 앞세운 ‘당당한 외교’로 설정했다. 그러면서도 한국판 인태 전략 보고서에 중국을 ‘주요 협력국’으로 명시해 중국과의 안정적 관계 유지를 희망하고 있다. 불확실성 시대의 국가 생존 전략의 두 축, 즉 국가안전과 지속 가능한 경제발전 확보에 부심하는 한국의 입장을 마치 한미 동맹의 종속변수인 양 인식하는 중국의 태도는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이다.
대만해협을 둘러싼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1992년 수교 성명에서 ‘하나의 중국’ 주장에 동의했고 지금도 이는 변함이 없다. 다만 일방적으로 현상 변경을 시도하는 행위에 반대한다는 국제주의 원칙을 강조한 것이다. 중국은 오히려 힘에 의한 일방적 변경 시도인 북핵 문제를 도외시하고 북한의 우려만 강조하면서 가해자인 북한을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기묘한 논리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이제 중국도 대한국 인식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한미 동맹 강화나 진화된 안보 협력의 본질은 북핵에 있으며 한국의 1차 목표는 북한 비핵화를 통한 안정적인 평화 환경 구축이기 때문이다. 북핵 위협은 한국에는 생존의 문제다. 이 상황에서 대북 제재와 압박보다는 북한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중국의 주장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이미 비핵화 논의는 주변화됐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갖춘 북한과의 ‘핵 있는 평화(nuclear peace)’가 우려되는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실에서 일방적으로 한국의 외교 노선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겁박성 ‘내정간섭’이다. 윤 대통령까지 나서 중국을 질책했을 만큼 사안이 간단치 않다. 적어도 북한은 핵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나타냈고 한국 정부의 선의는 철저히 무시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체제 보장과 제재 해제가 아님이 드러난 상황에서 평화 수호를 목표로 한미 동맹 강화가 추진되는 것이다. 북핵의 방향성이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잡히면 한국의 일정한 외교 공간 창출도 가능해질 것임을 중국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 등에서 세계 1위 제조 경쟁력을 갖춘 한국이 공급망 재편 논의에서 미국 편에 서 중국에 대한 압박을 선도한다는 식의 중국의 인식도 합리적이지 못하다. 한국이 공급망 다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상당 부분의 주요 원자재를 특정 국가에 의존하는 현실을 고려해 안정적인 공급망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모두 중국을 겨냥한 것은 결코 아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중국이 계속 과도한 일방적 우려를 표명하면 한국의 선택지는 좁아진다. 자칫 중국이 그토록 원하지 않는 한미 동맹 강화나 한미일 삼각 공조 확대를 더욱 추동할 소지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중 양국은 싱 대사 논란을 계기로 ‘상호 존중’ 등의 기준점을 재정립할 상황이 됐으며 이제 탐색기를 끝내고 본격적인 대화와 소통에 나서야 할 필요성이 부각됐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외교 방향성이 달갑지 않더라도 적절한 소통 없이 압박을 강화하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외교는 상대방이 있으며 변화무쌍한 생물이다. 미국도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의 방중으로 갈등이 충돌로 비화하지 않도록 책임 있게 관리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졌고 중국도 싫지 않은 분위기다. 한중 관계도 얼마든지 새로운 균형점을 찾을 수 있다. 일방적인 상호 주장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갈등 국면 타개를 위한 양국의 지혜를 기대한다.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 교수이며 중국 및 국제 문제 시사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만 정치대에서 중국정치경제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아 중국 정치·경제, 미중 관계, 한중 관계, 양안 관계에 정통하다. 한중사회과학학회 회장을 지냈고 중국 상하이사회과학원 명예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및 해군발전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