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초년생과 신혼부부 등 주거 취약층들을 구렁텅이로 빠뜨린 전세 사기꾼들이 잇따라 덜미를 잡히고 있지만 정작 그에 걸맞은 수준의 형벌을 내리기는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로선 한 건 당 일정 금액 이상의 피해가 발생해야만 강력한 처벌이 가능한데, 전세사기 범죄 특성상 총 피해 금액은 크지만 수 십, 수 백 명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건 당 피해액이 기준액에 미치지 못해서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전세사기 범죄자 가중처벌을 위한 개정 법안이 국회에 발의됐지만 좀처럼 논의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어 피해자들은 속만 타는 상황이다.
9일 대검찰청과 경찰청, 국토부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전세사기 피해자는 2996명이며 피해금액은 4599억원에 달했다. 20·30대 주거 취약계층이 절반 이상이었으며 1인당 피해금액은 2억원 이하가 80.2%로 대다수였다.
수 천 억 원 대 사기를 벌인 피의자들은 속속 검거돼 재판에 넘겨지고 있지만, 지은 죄에 비해 높은 형량을 선고 받지는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84억원대 전세사기를 저지른 이른바 ‘강서구 빌라왕’ 이모(66)씨는 이달 6일 1심에서 사기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 받았다. 반면 ‘영세 어민 33억 원대 사기’ A씨는 이씨보다 훨씬 적은 금액을 편취했음에도 징역 14년을, '렌터카 20억 투자 사기' 피고인 B씨는 징역 12년을 지난달 각각 항소심에서 선고 받았다.
이 같은 결과가 나온 이유는 A씨와 B씨에게는 최고 무기징역까지 선고 가능한 특정경제 범죄 가중 처벌 등에 관한 법(특경법)이, 이씨에게는 징역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법정형인 일반 형법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특경법은 단일한 범죄에 대해 재산상 이익의 가액이 5억원 이상 시 적용되는데, 다수 피해자들이 각각 다르게 사기를 당한 전세사기의 경우 대부분 여기에 해당되지 않아 가중처벌이 어렵다.
이에 검찰은 범죄단체조직죄 등 사기 외 다른 혐의를 적극 적용해 최대 징역 15년까지 구형하거나, 횡령 등 추가 혐의를 발견해 특경법을 적용할 수 있을지도 적극 검토중이다. 하지만 적용 대상이 한정적이고 그 이상의 처벌이 어려워 결국 법 개정이 불가피 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유상범·조수진 의원 등은 전세사기처럼 범행 방법이 동일한 등의 경우 최고 형량이 무기징역까지 가능한 특경법을 적용할 수 있는 개정안을 지난 4월 발의했지만 두 달 넘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법원행정처가 ‘예외조항을 두면 원칙이 허물어질 수 있다’는 취지로 반대한 것인데, 아직까지도 법무부 등 소관 부서와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전세사기 피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피해자만 벌써 여럿”이라며 “국회와 법원행정처, 법무부 등에서도 관련 입법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