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를 아시나요. 영화에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이 있다면 뮤지컬에는 ‘넘버’가 있습니다. 이제 넘버가 뭔지 아시겠죠. 넘버는 바로 뮤지컬에 등장하는 ‘곡’입니다. 넘버의 뜻은 아시다시피 숫자, 영어로 ‘Number’입니다. 용어가 좀 직관적이지 않죠. 거의 대부분의 서사가 음악으로 이뤄지는 뮤지컬인데 왜 노래를 부르는 용어에는 ‘음악’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는 걸까요.
사실 어떤 자료를 찾아봐도 ‘언제부터’ ‘왜’ 뮤지컬 속 노래를 ‘넘버’라고 불렀는지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몇 가지 이유를 추정해볼 수는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유는 뮤지컬 ‘연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같은 곡의 반복, ‘리프라이즈(reprise)’입니다. 하나의 멜로디를 가진 곡이 극 중 여러 차례 나오는 거죠. 예컨대 ‘사랑해’라는 제목의 노래가 1막과 2막에 한 번씩 등장한다면 연습할 때 ‘사랑해부터 다시 할게요’라고 하기보다는 ‘7번부터 다시 할게요’라고 말하는 게 더 효율적인 거죠. 또 뮤지컬은 1막과 2막밖에 없잖아요. 연습을 하다 중단되고 다시 연습을 할 때 ‘1막부터, 2막부터’라고 할 수 없으니 ‘7번부터’라고 하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넘버에 대해 알았으니 이제 넘버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뮤지컬 초심자들은 뮤지컬을 보러 가기 전 넘버를 미리 들어두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됩니다. 좀 더 극에 집중할 수 있고 함께 박수도 치고 흥에 겨울 수 있기 때문이죠. 또 내가 좋아하는 넘버가 나오면 녹음으로 들을 때와 실제 라이브로 들을 때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제 아무리 ‘브루노 마스’가 내한 공연을 해도 노래를 한 곡도 모른다면 재미를 느끼기 힘든 것과 똑같은 이치죠. 저는 오늘 라이선스 뮤지컬 중 제가 가장 좋았던 넘버와 그 넘버를 들었을 때 저의 느낌, 해당 넘버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배우를 소개할까 합니다. 다만, 모든 건 ‘개인 취향’인거 아시죠?
레미제라블은 올해 하반기에 막을 올리는 대작 중 대작 뮤지컬입니다. 저는 서울 광화문에서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5년에 이 뮤지컬을 봤는데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저처럼 이 뮤지컬을 봤다고 해요. ‘당신은 듣고 있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로 시작되는 ‘프로덕션 넘버’와 당시 상황이 겹쳐졌기 때문이겠죠.(프로덕션 넘버는 뮤지컬의 하이라이트 격인 규모가 큰 넘버를 말합니다.)
하지만 제가 추천할 넘버는 이 곡이 아닙니다. 저의 레미제라블 속 ‘최애’ 넘버는 ‘집주인(Master of the house)’입니다. 우리가 ‘블랙코미디’라는 말 많이 하죠. 블랙코미디는 웃기긴 한데 분위기가 어둡고 결국 무엇인가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형식의 코미디입니다. 이 곡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레미제라블에서 이 넘버를 부르는 여관집 주인, 떼나르디에 부부는 혁명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손님들을 등쳐 먹는 데에만 집중하는 ‘극혐’ 부부입니다.
하지만 시종일관 어둡기만 한 공연 중 떼나르디에 부부의 공연은 ‘유일하고도 큰’ 웃음 포인트입니다. 뮤지컬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체 왜 무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데 노래를 부르는 것이냐’고 말하곤 하죠. ‘서사가 없는 극’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께 레미제라블을 추천합니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뮤지컬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뮤지컬 속 넘버는 대사고, 연기고, 춤이라는 사실을 바로 이 곡이 잘 보여주고 있죠.
제가 관람한 공연에서 떼나르디에 부부의 ‘부인’ 역할은 박준면 배우가 맡았었는데요. “공주 마마 납셨네”라며 코제트를 괴롭히며 등장할 때의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박준면 배우는 2013년 이 배역으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떼나르디에 부인을 박준면 배우 말고 다른 배우가 하는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는데요. 하반기에 있을 공연 오디션이 진행된다고 하니 캐스팅을 기대해봅니다.
또 만약 영상으로 이 넘버를 찾아보고 싶은 분들께는 아런 암스트롱과 제니 갤러웨이가 등장하는 ‘레미제라블 10주년 공연’ 콘서트를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뮤지컬 넘버가 콘서트에서 흘러나오는데 이렇게 흥겹고 웃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갈지 몰라요.
두 번째 소개할 넘버는 모두들 잘 아는 뮤지컬 ‘엘리자벳’의 ‘나는 나만의 것’입니다. 노래를 들을 때 ‘가사’를 듣는 사람이 있고 ‘멜로디’를 듣는 사람이 있죠. 저는 ‘가사파’인데요. ‘나는 나만의 것’은 뮤지컬 가사도 멜로디도 아니고 이 넘버를 부르는 ‘배우’에게 매료돼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명곡입니다. 이 넘버의 가사는 ‘난 싫어, 이런 삶, 새장 속의 새처럼’으로 시작합니다. 도입부에서는 엘리자벳이 혼자 읊조리듯 이런 삶이 싫다며 인형 같은 내 모습이 싫다고 노래하며 무대를 서성입니다.
‘내 주인은 나야’라고 말하지만 처음에는 큰 소리로 말하지 않죠. 그러다 ‘눈 부신 들판을 말 타고 달리기를 원한다’며 본격적으로 탈출을 꿈꾸는 엘리자벳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그리고 또 ‘내 주인은 바로 나야’라는 가사가 등장하죠. 엘리자벳은 처음에는 말을 타고 달리고 싶다더니 곡 중반부터는 ‘이제 한 마리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가겠다’고 말하며 본격적으로 스케일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곡의 백미는 ‘간주’라고 생각하는데요. 자유를 원한다고 한참을 말하던 엘리자벳이 커다란 드레스를 입고 봇짐을 들고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엘리자벳을 꽤 많이 본 저로서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자본’의 힘을 느낍니다. 정말 엘리자벳이 드넓은 들판과 숲을 지나 자유를 찾아 떠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는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다 100% 훌륭했습니다) 조정은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조정은 배우에게 이런 제 마음이 전해질지 모르겠지만 저는 ‘베토벤’을 본 후로 ‘오스트리아’라는 나라를 생각하면 이제 조정은 배우가 떠오를 정도인데요. 간주 이전 엘리자벳이 자유를 ‘원하는 모습’과 간주 이후 엘리자벳이 자유를 ‘쟁취하러 떠나는 모습’은 단연 조정은 배우가 가장 잘 표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당당한 모습으로 빛을 받으면서 나아가는 모습이 오랜 기간 사랑 받아 온 ‘씨시’의 인기를 증명하는 것 같죠.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건 개인 취향입니다!)
뮤지컬 ‘위키드’는 해외에서도 ‘한국 위키드가 최고다’라는 찬사를 받는 공연 중 하나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뮤지컬에서 ‘파퓰러’를 가장 좋아합니다. 이 곡은 아리아나 그란데도 부른 바 있어 워낙 유명하죠. 저는 무엇보다 이 곡의 번역자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위키피디아에는 ‘영어 원문’과 ‘직역’과 ‘한국어 공연 가사’가 함께 게재돼 있기도 합니다.
'Popular! You're gonna be popular!'라는 부분을 ‘넌 곧 인기가 많아질 거야!’라고 부르지 않고 ‘파퓰러! 넌 이제 곧 파퓰러’라고 부르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보기만 해도 입에 착 달라붙는 것 같지 않나요?
저는 정선아 배우가 글린다 역할을 맡은 공연을 봤는데요. ‘파퓰러’라는 단어를 어찌나 맛깔나게 발음하는지 집에 와서도 한동안 ‘파퓰러~’를 읊조리고 다녔습니다. 이 곡은 가수가 아닌 제가 봐도 꽤 어렵게 들립니다. 연기도 잘해야 할 거 같고, 중간에 숨쉬는 연기도 필요하고, 박자도 느렸다 빨랐다…옆에서 수줍은 표정을 짓는 엘파바에게 시종일관 ‘파퓰러하게 해줄게’라고 말하는 글린다를 보면 없던 자존감도 생겨나는 기분입니다. 저는 자신감이 낮아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 곡을 듣습니다. ‘중요한 건 예쁜 척, 잘나가는 척, 겉모습이 중요해. 그게 바로 파퓰러’라는 가사를 듣다 보면 사실 ‘자신감이라는 게 별 게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가벼워지거든요. 글린다처럼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확신을 갖자고 생각하곤 합니다.
◇사실 고작 세 곡만 찾는 건 너무 어려웠습니다. 모든 뮤지컬에는 ‘최애 넘버’가 있거든요. 여러분들의 최애 넘버는 무엇인가요. 오늘 대극장에서 주로 공연되는 라이선스 공연의 넘버를 추천해봤는데요. 다음엔 또 다른 주제로 넘버 플레이 리스트를 소개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