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어요. 콘텐츠를 만드는 극장과 가져오는 극장. 세종문화회관은 자신만의 예술 단체가 있는 극장인데도 자기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는 거죠. ‘제작 극장이 되겠다’는 의미는 우리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때가 됐다는 거고 ‘관객 전문가’인 기획자의 시선에서 관객의 요구에 부응하면 우리 공연장이 주목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안호상(64)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우리 극장만의 색깔을 유지하겠다는 목표는 우리가 콘텐츠를 만들 때 가능한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1995년 예술의전당에 입사한 후 공연계에 30여 년을 몸담아온 안 사장은 국립극장장을 거쳐 2021년 세종문화회관 사장으로 임명됐다. 서울시예술단을 중심으로 한 ‘제작 극장’으로의 변화는 취임 이래 그가 추구해 온 기치다.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은 23편의 공연을 144회 선보인 데 이어 올해는 28편의 공연을 251회 제작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많은 공연 편수만큼이나 관객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상반기 시즌 공연 중 뮤지컬 ‘다시, 봄’과 연극 ‘키스’, 합창 ‘마스터 시리즈’는 일부 회차가 매진됐을 정도다.
서울시무용단 공연 ‘일무’는 세종문화회관이 거둔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일무’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종묘제례악의 의식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지난해 5월 초연된 후 공연의 구성을 확대해 올해 5월에 다시 관객을 찾았다. 총 4회차 중 3회의 공연이 전석 매진됐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보였다. 20~22일에는 전 세계 ‘꿈의 공연장’인 뉴욕 링컨센터에 초청돼 ‘코리안 아츠 위크’의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중 하나로 무대에 오른다.
‘일무’의 성공은 단순히 한 공연의 성공으로 그치지 않는다. 3일간 이어지는 공연을 찾은 세계적 예술계 인사들의 호평이 유럽·남미 등 각지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정식 프로그램 구성에 포함돼 최대 190달러(약 24만 6000원)의 가격을 받는 만큼 고품질의 공연을 선보일 것이라는 의지도 더해졌다.
안 사장은 “‘일무’가 뉴욕 관객들에게 평가를 제대로 받으면 앞으로 한국 공연을 초청하겠다는 극장들이 많이 나올 수도 있다”며 “현재 K팝이나 K드라마는 세계적으로 가장 핫한 장르가 됐는데 한국의 순수 전통 예술에 기반한 작품이 반응을 얻는다면 K콘텐츠의 영역이 다른 차원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고전적인 작품들도 해외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잘 만든 콘텐츠의 힘은 강력하다. 2012년부터 5년간 국립극장에서 성공적으로 ‘국립 레퍼토리 시즌’의 안착을 이끌어낸 그의 경력이 증명한 메시지다. 레퍼토리 시즌을 구성하기 위해 국립극장장으로 재임할 당시 안 사장이 내걸었던 캐치프레이즈는 ‘우리 전통의 동시대화’였다. 그는 “국립극장은 우리 전통에 기반한 창작 공연을 하는 곳인데 관객들은 이러한 공연들을 과거에 있던 공연의 원형을 재현하는 수준으로만 생각하더라”면서 “이 때문에 ‘춘향’이나 ‘심청’을 새롭게 연출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관심이 없었다”고 밝혔다.
관객을 소구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던 안 사장은 당시 방영됐던 인기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을 떠올렸다. 그는 “지금 사람들이 소비하고 있는 콘텐츠와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대중을 끌어당겼다고 봤다”면서 “국립극장의 공연들도 현대적인 코드를 가미하면 지금 사람들이 충분히 소비할 수 있다고 생각해 레퍼토리 시즌을 선언했다”고 말했다. 이 결과 2013년 초연된 국립무용단의 ‘묵향’은 2016년 홍콩예술축제에 초청되고 프랑스 리옹 레 뉘 드 푸르비에르 페스티벌 무대에 한국 작품 최초로 서는 등 해외 유수의 무대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안 사장은 세종문화회관에서도 관객과 함께하는 ‘세종’만의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그는 “자신의 공연을 만들 때 가장 확실하게 극장의 성격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이를 통해 극장의 방향이나 의도를 이해하는 관객이 만들어지면 관객과 극장 기획자와의 거리가 좁혀지게 되고 이후 나타나는 교감과 반응을 통해 관객과 더 밀착하는 극장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이전 세종문화회관의 공연은 뚜렷한 색깔을 발휘하는 데 약점을 보였다고 짚었다. 안 사장은 “세종문화회관이 다양한 장르를 수용하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오게 하는 데는 장점이 있었지만 같은 장르의 작품 중 질적으로 진폭이 심한 작품들을 수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면서 “그런 부분들 때문에 세종문화회관에 대한 관객들의 충성도나 집중력이 낮아졌다”고 분석했다.
6일부터 현대무용 ‘몸으로 몸한다’를 시작으로 무대에 오르는 세종문화회관 컨템포러리 시즌 ‘싱크 넥스트 23’는 실험적 측면에서 고유의 색깔을 낸다. 대극장이 아닌 S씨어터에서 선보이는 만큼 다른 시즌 공연에 비해 관객 수는 적을 수 있지만 예술적인 의미는 크다. 안 사장은 “‘싱크 넥스트’는 실험적인 예술을 모으는 플랫폼”이라면서 “예술이라는 게 이전에 표현되지 않았던 영역의 감성을 표현해 처음에는 낯설 수 있다. ‘싱크 넥스트’에서 반응이 뜨거운 공연도 있고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공연도 있지만 모두 의미 있는 고민의 결과물이라고 보고 내놓은 것”이라고 전했다.
반평생을 극장에서 살아온 그에게 예술과 공연은 어떤 의미일까. 안 사장은 초등학교 시절 영화 ‘벤허’를 보고 느낀 문화적 충격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시골에서 자라 문화를 즐기지 못했는데 초등학교 5학년이 되고 시내로 전학 가서 ‘벤허’를 본 후 ‘이런 세상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후 건축에 관심을 가지다가 예술의전당에서 새로운 극장을 짓는다고 해서 지원한 게 여기까지 왔네요.”
그는 좋은 자원을 갖춘 세종문화회관을 통해 공연 예술의 긍정적인 면을 전달할 계획이다. 안 사장의 오랜 경험에 더해 양질의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도록 발전한 예술단의 능력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시대 관객들의 감성을 포착하고 새로움을 선보이는 공연장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안 사장은 “충분한 극장 문화가 발달하면 국민들이 문화 예술을 향유하면서 위안과 창의적인 자극을 느낄 수 있다”며 “공연장은 이들에게 교육 공간이기도, 위로의 공간이기도,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희망의 공간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많은 변화를 예고한 만큼 해결해야 할 과제도 산적해 있다. 그럼에도 안 사장은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우리가 제작 극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내부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데 기존에 있던 질서를 바꾸는 일이니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면서 “그러니 설득도 해야 되는데 롤러코스터 같은 마음이 든다. ‘일무’ 공연도 응원해주신 만큼 잘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