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3차 시기. 어깨에 걸쳐진 바벨이 무척 버겁게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가뿐하게 들어올렸을 170㎏. 있는 힘을 다해봤지만 무게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아마도 실패할 것을 알고도 마지막 승부를 했을 대한민국 최고의 역사(力士)는 끝내 바벨을 떨어뜨렸다. 당황한 듯 허공을 응시하던 그는 이내 숨을 가다듬고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바벨로 다가가 가벼운 손 키스를 나눴다.
2012년 8월. 장미란의 마지막 올림픽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장미란은 170㎏보다 몇 배는 더 무거웠을 부담감도 내려놓았다.
장미란은 펑펑 울었다. 아쉬운 결과를, 국민들에 대한 감사를, 그간의 회한을 가슴에 꾹꾹 눌러 소리 내지 않고 울었다.
처음부터 힘든 싸움이 예상됐다.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한 장미란의 몸은 이미 예전 같지 않았다. 왼쪽 어깨, 허리, 무릎, 팔꿈치까지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장미란을 향한 사람들의 기대는 너무 컸다. 모든 이가 금메달을 따주기를 원했기에 그는 아프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역도는 정직한 운동이었고 장미란의 실패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싫었던 것은 마지막까지 바벨과의 싸움에 온몸과 마음을 다해 치열하게 임한 그의 정직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깨 위로 팔을 들지도 못할 몸으로 국민들의 기대와 성원에 부응하려고 이를 악물었을 그는 결코 기적이나 요행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2013년 1월. 장미란은 은퇴를 선언했다. 15년간 정들었던 바벨을 내려놓은 그는 은퇴식에서도 참 많은 눈물을 흘렸다.
장미란이 국민들에게 준 환희와 감격은 고스란히 남았다. 그는 2005년부터 4년 연속 세계선수권대회를 제패한 챔피언이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오랫동안 세계 여자 역도를 지배한 여제였다.
은퇴 후 장미란재단을 설립해 선수 시절에 받았던 사랑을 나누며 살던 그는 올해 초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생과 역도는 무게를 견디며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쉽지는 않지만 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운동선수에게는 성공과 실패가 숙명처럼 따라다니지만 여기에 동요하지 않는 그만의 비법도 공개했다. 실패하면 ‘아직 나한테 성공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구나’ 생각하고 성공하면 ‘한 번에 이렇게 잘될 리가 없어’라며 스스로를 경계한다고 했다.
2021년 용인대 교수로 복직해 후배들을 가르치던 그가 지난달 29일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에 임명됐다. 국가대표 출신 차관은 사격의 박종길, 수영의 최윤희에 이어 세 번째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는 처음이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2019년 심석희 선수 미투와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으로 체육계가 떠들썩했을 때도 장미란 차관은 침묵했다”며 차관으로서의 자격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체육계의 공정과 상식을 실현하기 위해 이렇다 할 노력은 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해온 장 차관을 체육계의 ‘공정과 상식’을 위해 발탁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도 했다. 미투 가해자를 두둔했다면 이 지적이 맞겠지만 안 의원은 ‘왜 말 안 했느냐’를 따졌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니 자격이 없다는 논리다.
첫 출근길에 기자가 물었다. ‘불편한 질문일 수 있는데요…’ 안 의원의 지적에 대한 질문이었고 장 차관은 차분하게 답했다. “염려해주시는 만큼 더 열심히 해야겠다. 그 이상으로 부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불편했을, 아니 불쾌했을 저격에 그는 공손한 존중을 보냈다.
많은 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패자의 모습을 보여준, 땀과 노력의 정직함을 깨닫게 해준 ‘로즈란’ 장미란. 오랜 선수 경험, 체육교육 및 행정에 관한 전문지식 등 자격을 두루 갖춘 젊은 차관이 한국 체육계에 가져올 변화의 바람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