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달러 가치가 1년 여만에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긴축 종료 기대감이 커지면서 강달러 시대가 저물 것이라는 전망에 투자자들이 베팅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양한 자산 가격에 영향을 줄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다만 이 같은 흐름이 장기적으로 이어질지는 두고 봐야 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세계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이달 14일(현지 시간) 99.77로 마감했다. 전날 100선이 무너진 후 소폭 반등했으나 이를 다시 돌파하지 못했다. 달러인덱스가 100 아래로 떨어진 것은 미국의 금리 인상이 본격화됐던 지난해 4월 이후 15개월 만으로 금리인상기의 달러 가치 상승분이 반납된 것이다.
이는 미국의 물가가 다른 나라에 비해 가파르게 둔화한 영향이다.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일찍 긴축을 종료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달러는 약세를 보이고 있다. 월가 자금이 이미 추가 금리 인상의 여지가 있는 다른 나라들로 옮겨가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블룸버그통신은 미국 내 헤지펀드 자금이 올해 3월 이후 처음으로 달러화 순매도로 돌아섰다고 분석했다.
달러는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의 핵심으로 15개월 만의 약달러는 전 세계 위험자산에 훈풍을 불어넣을 수 있다. 달러를 팔고 신흥국 자산을 사는 ‘달러캐리 트레이드’가 유행할 수도 있다. 달러가 계속 약세를 보일 것이라는 인식이 시장에 퍼지면 투자자들은 달러를 팔아치우고 향후 가치가 오를 것으로 보이는 신흥국 화폐 및 자산을 사들이는 식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컨설팅사 코페이에 따르면 달러를 팔고 콜롬비아 페소화를 산 투자자가 올 들어 25%의 수익률을 올린 것으로 추정됐고 멕시코 페소화를 산 사람은 20%의 수익을 낸 것으로 분석됐다. 파레시 우파드야야 아문디자산운용 외환전략부문장은 카자흐스탄·우루과이·인도 등의 화폐가 유망하다고 꼽았다.
당장 강달러로 외환위기까지 몰린 신흥국도 숨통이 트일 것으로 전망된다. 일부 신흥국은 달러 강세로 자국 화폐 가치가 급락하면서 달러 표시 외채 상환에 애를 먹었는데 달러가 약세로 돌아서면 그만큼 빚 갚는 어려움이 줄어들게 된다.
이 외에 달러 약세는 수출 경쟁력을 높여 미국 수출 기업에 도움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소속 다국적기업에도 혜택이 돌아간다. 가령 한국에서 3000원을 벌어들인 미국 기업은 환율이 달러당 1500원일 때는 미국으로 2달러를 송금할 수 있지만 달러 약세로 달러당 1000원이 되면 본국으로 3달러를 보낼 수 있어 그만큼 수익이 늘어나는 효과를 본다. 비스포크투자그룹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주요 기술 기업들은 매출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창출했는데 이들 기업이 약달러의 혜택을 볼 것으로 보인다. 헬렌 기븐 모넥스USA 트레이더는 “연준이 다른 나라 중앙은행보다 먼저 금리 인상을 중단해 달러의 장기 모멘텀을 약화시킬 것”이라며 “향후 6개월을 내다본다면 달러 가치는 지금보다 더 약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연준이 노동시장의 여건을 고려하면 긴축을 쉽게 멈추지 않을 것이며 달러 약세도 일시적일 것이라는 전망 또한 만만치 않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5일 경제전문가와 기업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향후 1년 내 미국에 경기 침체가 올 것으로 보는 사람은 54%로 1월과 4월 조사 때의 61%에서 7%포인트 하락했다. 응답의 낙폭은 2020년 8월 이후 최대였다. 응답자들은 2분기 미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1.5%(전 분기 대비)로 보며 이전 조사 때의 0.2%에서 대폭 올려 잡았다. 다른 국가들에 비해 미국 경제가 상대적으로 양호한 만큼 글로벌 자금이 미국으로 쏠리며 달러 가치를 떠받칠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