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 상승과 가계부채 증가 등 금융 불안 문제가 다시 불거지는 가운데 이를 연착륙시키려면 금융기관의 유동성 공급 호스부터 틀어 막아야 한다는 한국은행 보고서가 나왔다. 지난 10년 동안 나타난 집값 급등과 가계부채 증가의 근본적인 원인이자 해결책으로 유동성을 지목한 것이다. 저금리 기조 장기화도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언급한 만큼 통화 당국 내부에서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나온 셈이다.
보고서를 살펴보면 집값이 먼저 오르면서 가계부채가 따라 늘어난 것이 아니라 가계부채가 늘었기 때문에 집값이 올랐다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대출 문턱부터 서서히 높여야 가계부채 문제가 연착륙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특히 전세대출의 보증 대상을 축소하고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대상에 전세금부터 이주비·중도금까지도 포함해야 한다는 강도 높은 대책을 주문했다. 다만 이는 중장기적인 방안이고 구체적인 정책 협의는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또 이같은 시각이 한은 전체를 대변한다고 단정하기 아직 이르다.
17일 한국은행 경제연구원 소속 이경태 부연구위원과 강환구 금융통화연구실장은 ‘장기구조적 관점에서 본 가계부채 증가의 원인과 영향 및 연착륙 방안’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43개국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22년 4분기 기준 105.0%로 스위스(128.3%), 호주(111.8%)에 이은 3위를 기록했다. 2010년 14위에서 지난해 3위로 12년 만에 11계단이나 수직 상승했다. 국제 비교가 가능한 국제결제은행(BIS) 기준이다.
학계에선 소비와 성장을 제약하는 GDP 대비 가계부채비율 임계치를 50~80%로 본다. 우리나라는 이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이창용 총재도 지난 13일 기자간담회에서 “가계부채를 하향 기조로 가져가야 하지만 너무 빨라도 문제가 있기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80% 수준까지 내려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만 이는 상당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가계부채 증가율을 3%로 명목 GDP 성장률 4%보다 낮은 수준으로 묶어둔다고 했을 때 GDP 대비 가계부채비율이 90%로 내려오는 시점은 2039년이다. 덴마크, 네덜란드 등은 약 18년에 걸쳐 가계부채 연착륙에 성공했으나 호주, 스위스는 각각 17년, 23년이 지나도록 디레버리징을 진행 중이다.
해당 보고서는 중장기적인 가계부채 연착륙을 위한 다양한 대책을 언급하고 있다. 이를 크게 3가지로 나눠보면 ① 수요 측면의 거시건전성 대책 ② 공급 측면의 거시건전성 대책 ③ 통화정책으로 볼 수 있다. 수요 측면의 거시건전성 대책 대부분은 가계부문 경기대응완충자본 적립, 기업대출의 유동화 지원 등은 은행권이 가계보다 기업 대출을 늘릴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안이다.
주목할 것은 전세대출 보증한도 축소 방안도 포함됐다는 것이다. 한은에서 전세대출 보증제도 개편 필요성이 직접 언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 전세자금대출 대부분 보증기관의 보증 프로그램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무주택자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나 서울보증보험(SGI) 등을 이용하면 각각 최대 4억 원, 5억 원까지 전세보증금을 대출받을 수 있다. 전세대출 보증은 주거 취약층의 주거 상태를 개선하는 효과가 분명하지만 수혜 대상이 넓어지면서 결국 전세자금을 밀어 올리는 등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2012년 23조 원 수준이었던 전세자금대출 잔액은 2016년부터 급증해 2019년 100조 원을 넘었고 2021년 말엔 180조 원까지 증가했다. 가계부채는 2010~2014년 중 평균 71조 원씩 늘어나다가 2015~2019년 중 연평균 115조 원으로 큰 폭 증가했다. 2020~2021년엔 연평균 180조 원까지 확대됐다. 전세자금대출만으로 가계부채가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가계부채 디레버리징을 위해선 보증지원대상을 구매력이 낮은 저소득층·청년층·다자녀가구 등으로 조정해 전세대출 확대가 주택투자 가수요로 이어지는 것을 완화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이 부연구위원은 “2010년까지만 해도 전세대출 보증 한도가 크지 않았는데 2015년 이후 급격히 늘어났다”며 “너무 많은 신용이 전세 시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완만하게 조정하는 등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종합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은뿐만 아니라 학계서도 전세대출 보증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지난달 한국금융학회의 정기학술대회에서 이윤수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전세대출 보증제도의 질서 있는 폐지까지 언급했다. 당시 이 교수는 “전세금이 세입자의 자기 자본이 아니라 은행의 대출금이 들어오게 되면서 집주인의 갭투자 여력이 증가했다”며 “은행과 집주인 사이엔 전세보증금 반환채권이 생겨도 보증 때문에 은행이 집주인에 대한 심사를 엄격하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전세 보증으로 전세대출이 늘면서 전세 가격은 상승하는데 보증사고는 증가하고 DSR 규제를 받지 않은 대출이 늘면서 취약차주의 연체율이 늘었다”고 꼬집었다.
보고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DSR 규제 대상에 전세자금대출을 포함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이는 지난해 말부터 한은이 금융안정보고서 등을 통해서 꾸준히 언급했던 사안이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서도 지난해 4월 ‘전세자금대출 증가에 따른 시장 변화 점검’을 통해 “전세자금대출 증가에 따른 유동성 증가가 주택가격에 미치는 영향을 축소하기 위해 전세자금대출을 DSR 산정에 포함해야 한다”라고 했다.
우리나라 DSR 규제는 2019년 12월 도입돼 2012~2014년부터 동 제도를 시행 중인 다른 나라보다 시기가 늦을 뿐만 아니라 전세자금대출, 이주비·중도금, 예·적금담보대출, 상용차금융, 할부, 1억 원 이하 신용대출 등 예외 대상이 많다. 이 역시 축소할 뿐만 아니라 주택담보인정비율(LTV)도 수준별로 차등금리를 적용할 뿐만 아니라 만기일시상환방식의 대출에 대해서도 가산금리를 적용하면서 대출 문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당 보고서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건전성 고려 통화정책(prudential monetary policy)’이 처음 언급됐다는 것이다. 경기호황 시 자산가격 급등에 대해 금리 인상으로 대응하는 것을 말한다. 완화적 통화정책이 과도한 레버리지 활용 및 위험자산 투자로 이어지지 않도록 금융안정을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다. 2021년 8월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선제적으로 인상한 것도 가계부채 증가와 집값 상승 문제가 금융안정을 저해하는 요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강 실장은 “그동안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동시 목표로 추진했는데 가계부채나 부동산 불안 가능성이 있을 땐 금융안정에 조금 더 중점을 두고 통화정책을 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대책이 나온 배경은 저금리 장기화 기조가 가계부채 증가와 집값 상승 원인 중 하나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가계 차입비용과 안전자산의 실질수익률이 크게 하락했고 가계가 다른 자산으로 투자할 유인이 확대됐다는 것이다. 1~2년짜리 정기예금의 수익률은 2013년 하반기부터 마이너스(-)로 전환해 2020~2022년엔 -1% 안팎까지 떨어졌다. 반면 수도권 주택과 종합주가지수 실질수익률은 2015~2021년 중 평균 2.2%, 4.4%를 기록했다. 2017~2022년 빚을 내지 않은 가구의 자산이 7100만 원 늘어나는 동안 해당 기간 중 대출을 새로 받은 가구의 자산은 1억 200만 원 증가했다. 빚투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단 것이다.
이 부연구위원은 “집값이 비싸서 대출이 생긴 것이 아니라 저금리로 신용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대출이 늘다 보니 집값을 올렸다는 분석이 미국에서 설득력을 갖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2015년 이후 금리가 상당히 낮아지면서 위험 선호를 자극해 자산시장 붐을 초래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했다.
※ ‘조지원의 BOK리포트’는 국내외 경제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 한국은행(Bank of Korea)을 중심으로 국내 경제·금융 전반의 소식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