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민은 잃었지만, 도쿄 도민은 지켜낼까?…100년 다된 야구장에 쏠린 눈 [이수민의 도쿄 부동산 산책]

3조원 넘는 재개발, 철거공사 시작 직전에 '올스톱'
메이지 신궁 외원 재개발…찬반 논쟁 불 붙어
“절차상 하자X, 녹지증가” VS “고목 피해, 역사 사라져”
韓 동대문야구장, 사진으로만 남아…日은 다를까?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초록빛이 넘실대는 기분 좋은 조깅코스’라고 언급한 메이지 신궁 외원의 ‘상징’ 은행나무 길. 열사병 경보가 발령된 지난 17일 정오에도 다수의 시민들이 연휴를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이수민기자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선곡한 노래와 콘텐츠를 담아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 저녁에 도쿄FM에서 방송되는 '무라카미 하루키 라디오' 대표 이미지/채널 홈페이지 갈무리


도쿄에는 허파 기능을 하는 도심 속 공원이 여럿입니다. 일정 규모가 되는 곳들만 꼽아 보자면 동쪽에는 우에노 공원, 중심에는 히비야 공원, 서쪽에는 요요기 공원과 신주쿠 교엔 , 그리고 메이지 신궁 외원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최근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메이지 신궁 외원(메이지 진구 가이엔·明治神宮外苑)이 그곳입니다.


“저는 메이지 신궁 외원의 재개발에 강하게 반대합니다. 초록빛이 넘실대는 기분 좋은 조깅 코스를, 그리고 멋진 진구 구장을 부디 이대로 남겨주세요. 한번 부숴진 것은 더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일본의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지난달 말,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무라카미 라디오’에서 이렇게 말하며 철거를 앞두고 있는 메이지 신궁 외원의 야구장과 공원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습니다. 메이지 신궁 외원 일대의 재개발을 반대한 유명 인사는 무라카미만이 아닙니다. 지난 3월 타계한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도 재개발 인허가를 내준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에 서신을 보내 “신궁 외원의 개발은 지속 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나무들을 미래의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사업을) 중단하고 재고해야 한다. 선대가 100년간 가꿔온 나무들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한 반대 의사를 밝혔는데요. 메이지 신궁 외원 재개발 사업, 대체 어떤 것이길래 이처럼 내로라 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입을 모아 반대하는 것일까요?




미쓰이 부동산 등 메이지 신궁 외원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사업주체들이 공개한 사업 구상도. 사업자는 현재 럭비장이 있는 위치에 야구장을 새롭게 짓고, 럭비장은 현 야구장 위치에 지어지는 방식을 통해 스포츠 경기 개최에 문제가 없도록 한다는 방침이다./사이트 갈무리


우선 메이지 신궁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이곳은 일본인들이 ‘근대 일본을 만든 통치자’로 칭송하는 메이지 천황을 봉헌한 신사입니다. 뭇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외원은 신궁에 딸린 부속 시설로 시민들이 언제든 즐길 수 있는 공원과 더불어 일본 대학 프로야구의 성지인 야구장, 럭비장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스포츠 시설과 녹지가 어우러진 시민을 위한 공원이라 할 수 있는데요. 특히 정문부터 야구장으로 이어지는 길에 일렬로 서 있는 수 백 그루의 은행나무가 만들어 낸 풍경은 2022년까지 별도의 축제로 즐길 정도로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메이지 신궁 외원 재개발은 총 사업비 3490억엔(약 3조1690억원) 규모로, 올해 3월 착공했습니다. 사업의 핵심은 준공 90년 이상이 지난 야구장과 준공 70년 이상 흐른 럭비장을 새롭게 짓는데 있습니다. 또한 외원과 맞닿아 있는 이토츄 상사의 도쿄 사옥과 일대 부지에 초고층 건물 2동을 새롭게 건설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거의 유사한 재개발 사업 플로우를 밟아야 하는 일본이기에, 사업자가 착공에 나섰다는 뜻은 관할 지자체인 도쿄도의 인·허가를 문제 없이 통과했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이 사업에 대한 사업시행인가가 떨어진 시점은 이보다 앞선 2월. 그런데 착공에 들어간 이후 유명 인사는 물론 시민 사회의 반발이 빗발치기 시작했습니다. 환경 단체는 물론, 지역 주민들의 반대 모임도 만들어졌고 학계에서도 ‘인·허가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 잇따랐습니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19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재개발에 반대하는 의사를 밝히며 연대 서명을 했다고 하네요. 철거 작업은 현재, 일시 중단된 상태입니다.




지난 17일 메이지 신궁 외원 경기장에 설치된 펜스에 붙은 철거공사 안내판/이수민 기자

국립경기장(우측)하고 맞붙어 있는 메이지 신궁 외원 한 켠에 철거 공사를 위한 준비가 이뤄지고 있다./이수민 기자


그렇다면 도쿄 시민들, 그리고 다수의 야구팬들이 오래된 스포츠 경기장을 철거하고 새롭게 짓는다는 이 사업에 왜 반대하는 것일까요? 재개발 구역의 3/4에 달하는 면적이 종교법인 메이지 신궁에 속한 ‘사유지’라는 상황에서도 말이죠. 가장 큰 이유는 메이지 신궁 외원이 품고 있는 자연 그 자체가 시민들과 더불어 살아가던 공간이었던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메이지 신궁은 조성 당시인 1926년, 일본 각지에서 3000 그루 이상의 나무를 기부받아 신사 경내와 외원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사업 계획을 보면 높이 3미터 이상의 나무 1904그루 가운데 743그루를 벌채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백년 가까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온 나무들을 잘라낸다? 이 부분에 많은 시민들은 ‘그렇다면 굳이 왜’라고 반발하는 것이죠.


사업을 통해 상당한 이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는 사업 주체들은 이렇게 항변했습니다. “녹지 면적의 비율은 지금 전체 면적의 25%인데 재개발을 끝내면 이 비율이 30%까지 증가한다”고 말입니다. 이를 위해 벌채한 나무보다 더 많은 837그루를 새로 심겠다고도 약속합니다. 그러나 학계에서 이 대답의 맹점을 지적하고 나섭니다. “(나무) 생육상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면적으로 따지면 늘지 몰라도 다시 심은 이후에 나무들이 지금처럼 잘 자라줄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이죠.




메이지 신궁 야구장과 마주보고 있는 호텔 청년관 로비에서 바라본 구장 전경. 1926년 10월 개장한 메이지 신궁 야구장은 수용인원 3만7900여석으로, 일본 프로야구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홈 구장이다. 지난 1929년부터 도쿄6대학 리그와 전일본대학야구선수권대회 등 대학야구를 대표하는 여러 경기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수민기자

지난 5월 13일 메이지 신궁 야구장에서 열린 대학야구 경기에서 메이지 대학 응원단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AFP연합뉴스


사업자 측의 해명은 시민들을 납득 시키기에는 부족했나 봅니다. 각종 시사 프로그램에 이 뉴스가 다뤄지고, 몇 달에 걸쳐 지역 주민들의 릴레이 시위가 열리자 (법적으로 공사를 강행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업주체들은 여론 달래기에 나섰습니다. 이달 17일부터 19일까지, 재개발 지역 반경 380미터 이내의 주민(8000가구)과 5000명의 사업자를 대상으로 사업 설명회를 연다고 하네요. 설명회에는 종교법인인 메이지 신궁과 디벨로퍼인 미쓰이 부동산, 일본 스포츠 부흥센터, 이토츄 상사 등 사업을 주도하는 4곳이 참석해 사업으로 거둘 수 있는 여러 효과에 대해 설명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미래 세대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마을만들기에 나서겠다’는 것이 설명회의 초점이라고 하는데요. 재개발을 하지 않을 경우 노후한 경기장을 보수 유지하는데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는 점도 강조할 방침입니다. 해당 사업이 도쿄도의 환경영향평가까지 모두 통과한 이후에 열리는 설명회이기에, 의견 수렴과 계획 변경보다는 주민 설득에 초점이 맞춰진 행사로 보이네요. 아무튼 이 과정이 시민들의 거센 반발을 잠재울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부분입니다.




지난달 말 도쿄에서 만난 오세훈 서울시장과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오 시장은 2006년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1기 재임기간 동대문야구장을 철거하고 자신의 공약인 디자인플라자를 추진했다. 고이케 도지사는 메이지 신궁 외원 재개발과 관련, 인허가 최고 책임자로서 주민들의 의견을 제 때 수렴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사진제공=서울시


아울러 도쿄 시민들이 해당 사업에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로는 △메이지 신궁 야구장의 오랜 역사가 사라진다(야구장은 준공일시 기준 이번 달로 96년 9개월을 맞이했습니다.) △도심의 경관이 고층 빌딩으로 파괴된다 △시민을 위한 공원이 상업적 용도로 변질된다, △재무회계가 불투명한 종교법인(메이지 신궁)이 막대한 이익을 거둔다 등등이 꼽히는데요. 이 지적의 참 거짓 여부를 떠나, 한국 특히 서울의 재개발과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외국인인 저는 몇 개월 간 학계와 시민 사회, 관료 등이 등판한 찬반토론 자체가 생경한 경험이었습니다. ‘천성산 도룡뇽 사건’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과도한 환경민원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며 비웃음을 사는 한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목에 이들처럼 의미 부여를 했을지 미지수입니다. 한국야구의 역사 그 자체였던 동대문야구장이 소수의 야구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큰 반발 없이 지난 2007년 12월 철거돼 사진 속 건물로만 남겨져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때때로 일본은 ‘통 바뀌지 않는 나라’라는 악평을 듣는 곳이긴 하지만, 가끔은 바뀌지 않아야 오래도록 기억하는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도쿄=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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