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 및 학령기 인구 감소로 소아암 환자는 지속적으로 줄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매년 1300명 이상 발생합니다. 전체 유병자는 1만 명에 육박합니다. 그런데도 전국에 소아암 전문의는 69명 뿐입니다. 이마저도 43명이 수도권에 근무하고 있고, 절반은 10년 뒤 은퇴를 앞두고 있습니다. ” (의료계의 한 관계자)
이것이 우리나라 소아암 진료 체계의 현 주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지방의 어린 환자가 아픈 몸을 이끌고 부모와 함께 의사를 찾아 왕복 10시간의 상경 진료를 받으러 전전하고 있다. 한 달에 5번. 치료를 받는 날이면 가뜩이나 걷기조차 힘든 아이는 길에서 이미 녹초가 된다. 아이와 동행하는 부모는 몸과 마음이 동시에 무너진다.
한 달에 5번은 힘겹지만 통원을 시도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집중 치료 기간에는 길게는 보름 이상 병원을 찾기도 한다. 이 때는 기업이나 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셰어하우스, 원룸, 고시텔 등에 주로 머문다. 어린 아이 혼자 그곳에서 지낼 수 없음은 물론이다. 가족도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 힘들다.
지난 20일 대한소아혈액종양학회 주관으로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1 세미나실에서 열린 '소아청소년암 필수진료체계 구축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는 우리나라 소아암 진료 체계 현 주소 진단과 정책 제언이 이어졌다. 앞서 열린 보건복지부의 설명회에서는 소아암 진료체계 구축 방안이 발표됐다.
급성림프모구백혈병 진단을 받은 4살 딸 예설이 엄마라고 밝힌 황미옥씨는 "예측할 수 없는 응급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면서 "소아암 환자가 집 근처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소아암 평균 치료 기간이 3년인데, 양산부산대병원이 문을 닫게 되면 수도권으로 전원해야 한다"면서 "지방의 부모가 수도권에서 임시로 숙박할 곳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병원 근처 쉼터 지원도 확대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황씨의 얘기를 듣던 임연정 충남대병원 부교수는 "병원에 두고 온 환자가 생각났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면서 "지난해부터 전공의가 없다 보니 365일 응급콜을 받고 있는데, 지난주 생후 16개월된 골수백혈병 영아가 상태가 중해 3일 간 7명의 의사를 만나야 했다"고 떠올렸다. 또 "조혈모 세포 이식이 필요한데 아이가 10kg밖에 안돼 서울로 가라고 권했다. 그런데 부모가 집을 구하는 것부터 해서 쌍둥이 형제를 어떻게 돌볼지 걱정이 많더라"며 안타까워했다.
현장의 의료진은 의료 인력이 부족한 데다 충원도 어려워 진료 공백이 우려된다고 입을 모았다. 백희조 화순전남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호남 지역인 광주·전북·전남에서 조혈모세포이식이 가능한 병원은 이달 기준 호남 지역 5개 대학병원 중 소아혈액종양 전문의를 3명 보유한 화순전남대병원이 유일하다. 이 병원조차 소아과 전공의는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부산·울산·경남 지역과 대전·충청·세종 지역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부울경에는 이달 기준 9개 병원 중 소아혈액종양 전문의가 2명 있는 양산부산대병원이 유일하게 입원과 외래진료, 조혈모세포 이식이 모두 가능하다. 대전·충청·세종의 경우 9개 병원 중 충남대병원만 조혈모세포 이식이 가능한 상태인데, 소아과 전공의는 단 한 명도 없다. 또 소아혈액종양 전문의가 있는 5개 병원 중 2개 병원에서 전문의가 퇴임을 앞두고 있다.
백 교수는 "의료인력 부족으로 담당자 출장, 병가 등으로 부재 시 진료 공백이 생기고 있고, 촉탁의(전담의)나 입원전담전문의는 1년 단위로 계약이 이뤄져 인력 충원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이로 인해 환자가 안전을 위협받고 진료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김지윤 칠곡경북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도 "응급실 진료가 축소되거나 어려워지면서 입원 진료도 줄고 있다"면서 "소아청소년 응급실 진료가 가능한 곳은 대구·경북에서 칠곡경북대병원이 유일하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소아혈액암 진료는 고위험 진료여서 민원, 소송 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의사를 뽑기도 어렵다. 지역 의료체계 붕괴가 임박했다"고 지적했다.
소아암 의료체계 붕괴를 막을 대안으로는 '권역별 거점병원' 운영과 지역 내 의료진이 협진하는 '개방형 진료 체계' 구축이 제시됐다.
백 교수는 "거점병원을 운영하려면 소아혈액종양 세부 전문의 2명, 전담의 2~3명, 소아과 타분과 전문의 4~6명 등 최소 8명의 의사가 필요하다"면서 "의료의 질을 높이기 위해 진료지원 인력도 담당간호사 2명, 약사 0.5명, 영양사 0.5명, 사회복지사 1명 등 최소 4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역 의료체계 붕괴가 임박해 환자들이 난민처럼 유랑하고 있고 진료대기 등으로 보호자의 동요도 큰 상태"라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처럼 연합의 필요를 절감해 지역의 전문의들이 협업하기로 결의했다"고 역설했다. 이어 "계명대병원 세부 전문의 교수, 영남대병원 세부 전문의 교수, 포항성모병원 전문의 과장, 지역 병원장이 의견을 모은 상태"라면서 "사업비와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된다면 지역 전문의 이탈을 막고 지역 환자에게 안정적인 의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가 체계를 손질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현행 행위별 수가제를 벗어나 지역별·기관별 보상제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현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의료비 부담을 줄이면서 보장률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필요도가 높지만 공급 자체가 부족한 필수 의료가 붕괴 위기를 맞은 것"이라면서 "행위별 수가제로는 소아암 환자 진료의 경우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건강보험법을 바꿔 기관별, 지역별로 소아청소년암 환자를 치료하면 집중적으로 보상하는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아청소년암 환자가 암 치료를 마친 후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황씨는 "완치 후에도 평생 부작용을 겪을 수 있다. 이 부분을 같이 고민해줘야 한다"면서 "26년 전 소아암으로 떠난 예설이 고모 등 가족 2명을 이미 암으로 떠나 보냈다. 예설이 만큼은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릎 꿇고 기도해서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아이가 어른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필수 의료 체계를 구축해달라"고 호소했다.
박향 보건복지부 공공보건정책관은 "권역별 거점병원 시범 사업을 진행하는데 최대한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고 수가 보상과 환자 부모를 위한 쉼터 마련 등을 위해 노력하겠다"면서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되도록 국회와 논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소아혈액암의 특수성을 고려해 인력 확보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대책도 함께 논의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복지부가 내놓은 소아암 진료체계 구축 방안에 따르면 정부는 소아암 환자가 거주지 인근에서 안정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충남권 충남대병원 △호남권 화순전남대병원 △경북권 칠곡경북대병원 △경남권 양산부산대병원 △경기권 국립암센터 등 전국 5개 권역에 거점병원을 육성하기로 했다.
복지부는 지역암센터와 어린이 공공전문진료센터 등 기존에 정부가 지정한 공공의료 수행기관 중 소아암 진료를 위한 핵심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병원을 중심으로 거점병원을 선정하고 적합한 진료모형을 개발했다. △병원 내 전담팀 진료체계 △지역 개방형 진료체계 △취약지역 지원체계 등이 그것이다.
병원 내 전담팀 진료체계는 소아암 전문의를 중심으로 입원전담의사나 촉탁의사, 소아감염과 소아내분비 등 다른 분과 소아과 전문의가 협력하는 모형이다. 호남권 화순전남대병원과 경남권 양산부산대병원, 충남권 충남대병원에 적용된다.
지역 개방형 진료체계는 경북권 칠곡경북대병원처럼 지역 내 대학병원(영남대병원·계명대 동산병원 등)이 많은 지역 특성을 활용해 대학병원 내 소아암 전문의와 소아암 치료 경력이 있는 지역 병·의원의 전문의가 거점병원 진료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취약지역 지원체계는 강원도처럼 소아암 전문의가 없는 의료 취약지역 내 대학병원에 경기권 거점병원인 국립암센터 소속 의사가 주기적으로 방문해 후속진료를 지원하는 체계다. 강원도 내 병원에서 치료가 어려운 수술이나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는 우선 국립암센터에서 치료한 후에 지역 내 병원으로 환자를 돌려보낸다.
박민수 복지부 제2 차관은 “소아암은 인구 감소에 따라 적정한 공급이 이뤄지지 않는 필수의료 분야이다. 소아암은 진단 후 1~2년 동안 집중 치료가 필요함을 고려해 환자와 가족이 불편함이 없도록 진료 체계가 안정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며 “이를 위해 관계 부처와 긴밀히 협조해 나가겠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