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자, 이 노래를 들어본 분들은 손을 한 번 들어주세요. 제 친구는 이 노래를 노래방에서 잘 부를 수 있다며 호언장담을 하더군요. 네, 맞습니다. 故 김광석의 노래를 즐겨듣는 분들은 노랫말만으로도 아련한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정답은 김광석의 노래 ‘그날들’입니다. ‘그날들’은 노래뿐 아니라 동명의 뮤지컬로 재탄생하기도 했죠. 며칠 전 저는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그날들’을 보고 왔습니다.
‘그날들’은 김광석의 노래로 구성된 주크박스 뮤지컬입니다. ‘그날들’을 대표하는 얼굴로는 10년째 전 시즌에 출연중인 배우 유준상이 떠오릅니다. 극 중 ‘정학’을 맡아 그날의 진실을 알아가는 서술자로 분하는데요. 무엇이든 최고가 아닌 2등을 기록하는 설움을 지니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인 ‘무영’과의 우정을 소중히 지키려는 인물입니다. 한국이 중국과 수교를 맺은 1992년, 함께 대통령 경호실에서 근무하는 정학과 무영은 ‘그녀’를 경호하라는 임무를 맡게 된 후 그와 나란히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 날 무영과 그녀는 정학의 곁에서 사라지고, 무영이 간첩이었다는 흉흉한 소문만 들려올 뿐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정말 무영은 나쁜 사람일까요? ‘그날들’을 보신 분들은 “왔다 감”이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의 넘버들엔 김광석의 나지막하지만 호소력 있는 원곡과는 다르게, 웅장한 편곡이 가미됐습니다. 떠나간 무영과 그녀를 그리면서 ‘그날들’을 부르는 정학을 보면 비장하면서 절절한 마음이 흠뻑 느껴지지요. 무영의 ‘사랑했지만’ 또한 말할 것도 없고요. 이렇게 ‘그날들’은 한국 창작 뮤지컬의 스테디셀러 중 하나로 굳건하게 자리잡았습니다.
창작 뮤지컬이라니, 조금 어색한 느낌을 주는 단어입니다. 모든 예술 작품은 창작된 것이니까요. 한 톨만큼의 창작 과정이 섞이지 않았다면 단순한 복제본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뮤지컬계에서는 엄연히 구분이 필요합니다. 창작 뮤지컬과는 반대되는 ‘라이선스 뮤지컬’이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라이선스 뮤지컬은 2001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크게 흥행하면서 뮤지컬계에 자리잡은 개념입니다. 해외 공연의 판권을 사서 국내 제작진이 만드는 공연 형태를 일컫습니다. 라이선스 뮤지컬은 레플리카(replica)와 논 레플리카(non-replica), 스몰 라이선스로 분류됩니다. 레플리카 뮤지컬은 원 작품을 변형 없이 그대로 가져와 무대에 올리는 것을 뜻하고, 논 레플리카 뮤지컬은 적절한 수준의 수정이 가능한 작품을 의미합니다. 논 레플리카 방식 중 일종인 스몰 라이선스는 대본과 악보만 수입해서 제작하는 방식을 일컫습니다.
창작 뮤지컬은 국내 제작진이 만들었지만, 라이선스 뮤지컬이 아닌 뮤지컬을 뜻합니다. 창작 과정 중 국내 제작진이 순수하게 모든 작업을 진행했을 수도, 해외 제작진과의 협업을 거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제작사가 주도적으로 창작 작업을 이끌어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장유정 연출이 극작과 연출을 겸하고, 장소영 음악감독이 함께한 ‘그날들’은 명실상부 한국 창작 뮤지컬이겠지요.
그렇다면 한국 창작 뮤지컬의 역사는 얼마나 길까요?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요, 노래와 춤의 민족이 아닌가요? 자그마치 약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현대적 의미에서 창작 뮤지컬의 시초는 1966년 예그린악단의 작품 ‘살짜기 옵서예’가 꼽힙니다. 고전소설 ‘배비장전’을 배경으로 제주 기생 ‘애랑’과 사별한 아내를 위해 지조를 지키려는 ‘배비장’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한국적 가락과 발레가 응용됐던,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도가 이뤄졌죠. 유명 가수 패티 김이 애랑의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 예그린악단은 재밌는 역사가 있습니다. 1972년 국립가무단으로 명칭이 변경된 후 1977년 국립 예그린 예술단으로 바뀌었어요. 이후 세종문화회관 개관과 함께 서울 시립가무단으로 변신한 후 현재는 서울시뮤지컬단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시뮤지컬단은 전통과 역사에 걸맞게 지난해 초연된 창작 뮤지컬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선보이고 있답니다.)
지금은 역사의 유산이 된 청와대를 배경으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통해 청춘을 노래하는 뮤지컬. ‘그날들’처럼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낸 창작 뮤지컬이 흥행을 일군 경우가 많습니다. 장유정 연출은 ‘김종욱 찾기’ ‘오! 당신이 잠든 사이’ 등 여러 뮤지컬을 흥행시킨 장본인입니다. 한국을 배경으로 작품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눈에 띄죠. 장유정 연출은 서면 인터뷰를 통해 그간 뮤지컬을 톺아보면 “사람은 사람 때문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딛고 일어설 위로도 받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습니다. 10주년을 맞은 ‘그날들’에 대해서는 “김광석의 노래가 아니었다면 이 작품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아직 매 공연 객석 한가운데 그의 자리를 남겨두는 이유이라고 하네요.
한국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하면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죠. 한국의 옛 역사를 다룬 작품들인데요. 1995년 초연을 올린 뮤지컬 ‘명성황후’가 그것입니다. 2007년 대극장 창작 뮤지컬 중 처음 100만 관객을 달성하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명성황후를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구한 말 격변의 시기 일본의 세력과 맞선 조선 왕실은 한국인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소재이잖아요. 올해 두 번째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뮤지컬 ‘영웅’도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그리면서 관객들의 공감을 샀습니다. 인기를 통해 뮤지컬 최초로 영화로 만들어진 후 3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분명 국내 창작 뮤지컬인데 외국을 배경으로 하는 뮤지컬도 많아요. 라이센스 뮤지컬이 워낙 흥행한 만큼 대중에게 ‘대극장 뮤지컬=외국 소재의 화려한 무대’라는 인식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해외 뮤지컬 창작진과 협업을 진행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브로드웨이 출신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열띤 활동이 눈에 띕니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의 작곡가로 유명한 와일드혼의 넘버는 대중적이고 중독적인 멜로디를 통해 작품에 확 ‘감기게’ 하는 맛을 불어넣죠.
와일드혼은 ‘데스노트’를 만든 각본가 아이반 맨첼과 함께 ‘마타하리’ ‘엑스칼리버’를, ‘레베카’ ‘엘리자벳’ 등을 연출한 로버트 요한슨과 함께 ‘웃는 남자’(그 눈을 떠~)를 제작했습니다. 모두 뮤덕이라면 익숙한 작품들인데요. ‘마타하리’는 네덜란드의 스파이를, ‘엑스칼리버’는 영국의 아서왕 전설을, ‘웃는 남자’는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다룹니다. 각양각색인 극 중 인물들의 국적만큼이나 언뜻 보면 외국에서 만들어진 듯한 이 뮤지컬들을 한국에서 제작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날들’의 이야기로 오늘의 커튼콜을 시작한 것을 기억하시나요? 올해 10주년을 맞은 뮤지컬은 ‘그날들’ 외에도 여럿이 있습니다.
올해 초 서울에서 10주년 공연을 진행했던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CJ문화재단의 뮤지컬 창작 지원 사업을 통해 200석 내외의 충무아트센터 소극장 블루에서 시작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높은 인기로 4연부터는 600석 규모의 대학로 유니플렉스에서 무대를 확장하며 관객들을 맞이해왔습니다. 이름이 같은 넘버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그만 아파도 돼, 그만 슬퍼도 돼, 그녀만 믿으면 돼. 언제나 우리를 비추는 눈부신 그녀만 믿으면 돼~”) 경쾌한 반주에 맞춰 처음 듣는 순간 설레는 마음이 불어오는 참 좋은 넘버죠.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를 거쳐 유수의 어워즈에서 상을 휩쓸어야만 꼭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뮤지컬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때는 뮤지컬을 향유하는 작은 국가에 불과했던 한국은, 창작 뮤지컬을 여럿 수출할 정도로 발전한 ‘뮤지컬 강국’이 되었고요. 10주년을 맞이한 뮤지컬들은 오랜 기간 관객들의 인기를 끌 수 있도록 한국의 창작진이 탄탄한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첫 삽을 뜬 많은 작품들이 계속해서 기대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