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역에서 자동차로 30분가량 달려 요코하마만을 지나자 고층 건물들이 들어선 ‘미나토미라이(港未來)21’ 지구가 나타났다.
사실 이곳은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노후 항만에 딸린 낡은 조선소만 있던 황량한 부지였다. 비슷한 입지인 우리 인천광역시가 제조업 거점의 지위를 상실한 것처럼 당시 요코하마도 점차 활력을 잃어가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요코하마시는 이곳에 기업들을 다시 한 번 끌어모으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1983년부터 대규모 재개발에 착수했다. 낡은 조선 시설을 외곽으로 옮기고 조선소가 떠난 항구를 공원과 쇼핑몰 등 문화 시설로 채웠다. 2000년대부터는 도쿄와 경쟁한다는 목표 하에 기업 유치도 시도했다.
대규모 규제 완화 카드도 꺼내 들었다. 2004년 기업유치조례를 제정하며 요코하마시에 둥지를 트는 기업에 최대 50억 엔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수도권규제법 폐지, 용적률 완화 등 중앙정부 차원의 유인책도 총동원됐다.
지방자치단체가 과감하게 규제를 풀자 꿈쩍 하지 않던 기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09년 일본을 대표하는 자동차 회사 닛산이 본사를 요코하마로 옮겼고 이어 히타치·소니·무라타 등 일본이 강점을 지닌 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의 연구개발(R&D)센터도 줄줄이 입주했다. 애플·LG 등 글로벌 기업들도 현지 기업의 R&D 시설과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실제로 요코하마 시청에 따르면 미나토미라이21 내 기업체 수는 2009년 1200여 개에서 지난해 기준 1890개로 60% 가까이 늘었다. 인공지능(AI)·로봇 등 신기술 확산으로 R&D 강화가 제조업 혁신의 전제 조건이 된 스마트 제조업 시대에는 개별 기업의 노력을 넘어 이를 뒷받침할 도시와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다른 나라에서는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안 되는 진입장벽 규제가 여전히 많다”며 “제조업에 서비스업을 융합해내는 혁신을 위해 정부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때 세계 전자 업계를 호령했던 소니·파나소닉·샤프 등 일본 대형 전자 기업들은 2010년대 초 일제히 대규모 적자를 맞았다. 오랜 기간 이어진 경제 불황과 하드웨어 제조에만 집착하던 기업들이 경쟁에서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면서 빚어진 현상이었다. ‘가전 왕국의 몰락’ ‘잘라파고스(재팬+갈라파고스)’라는 조롱까지 나올 정도였다.
일본 정부가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한 첨단 기술 규제를 대폭 완화한 것도 이때부터다. 요코하마 등 수도권이 포함된 10개 지역을 국가전략특구로 지정하고 지역별 특화 신사업에 대해서는 별도 승인 없이 바로 활용할 수 있는 특례 조항을 적용했다. 일일이 법과 규제를 바꿔나가는 식으로는 급속하게 변화하는 산업 추세에 대응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규제를 빠르게 혁파하자 글로벌 기업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2015년 요코하마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연구개발(R&D)센터를 짓기로 결정한 애플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애플은 의료·정보기술(IT) 간 융복합을 기반으로 헬스케어 기능을 포함한 애플워치를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요코하마를 택했다. 2017년부터 이 R&D센터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제조 기술 등 역량을 가진 일본의 인재를 흡수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인공지능(AI) 연구를 집중 수행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162개 대기업이 사업 입지 촉진 조례 인증을 받아 요코하마에 둥지를 틀었다. 이로 인한 일자리 창출 효과는 4만 명, 경제 효과는 1983년부터 2020년까지 3조 4968억 엔에 달한다.
기업이 모이기 시작하니 시너지 효과가 나오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현지에 들어선 각종 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의 R&D 역량을 활용하기 위한 발걸음이 이어진 것이다. 일례로 국내 기업 가운데 LG는 5개 주요 계열사 R&D 조직을 통합한 ‘LG이노베이션센터’를 미나토미라이에서 운영하고 있다. LG 현지법인 관계자는 “이곳에서 조달한 원자재나 소재로 제품 테스트를 하고 실험 데이터만 본사에 넘기는 식으로 연구가 이뤄진다”며 “복잡한 유통 과정 없이 빠른 R&D 결과 취합이 가능하다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요코하마시는 미나토미라이지구와 지역 내 기업·대학 등 단체들이 교류할 수 있는 행사를 정기적으로 열어 기업 생태계를 일궜다. 2019년 요코하마시가 설립한 창업 보육 시설인 ‘요코하마창조도시센터(YOXO)’가 대표적이다. 이곳에서는 기업이 업체·대학·연구기관 등 외부와 협업해 필요한 기술과 아이디어를 조달하고 새로운 제품과 사업 기회를 창출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을 적극 장려한다.
미나토미라이지구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혁신 제품의 1차 ‘테스트베드(시험대)’로 활용할 수도 있다. 올해 초 닛산자동차는 NTT데이터와 협업해 만든 합승 애플리케이션을, 일본 반도체 업체 마크니카는 프랑스 자율주행 스타트업 나비아와 함께 자율주행 셔틀과 AR 글라스를 결합한 제품을 선보이는 실증 실험을 미나토미라이지구에서 진행했다.
우니가메 마사히코 요코하마시 신산업진흥과 창업혁신실 과장은 “기업 입장에서는 어떤 연령대의 소비자가 유입되는지, 또 이들이 어느 정도의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지 등 다양한 요소를 확인할 수 있어 호응도가 높다”며 “기업들이 투자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이면서도 빠르게 기술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돕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탄탄한 R&D 기능이 확보되자 제조업까지 꿈틀대고 있다. AI·로봇 등 신기술의 제조업 이식 속도가 가속화된 영향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3월 일본 각지에 분산됐던 반도체 연구 조직을 하나로 통합한 ‘디바이스솔루션리서치재팬(DSJR)’을 요코하마에 설립했다. 2025년 가동을 목표로 3000억 원 이상을 투자해 DSJR에 첨단 반도체 패키징 라인도 조성한다. 반도체 칩을 탑재할 기기에 맞는 형태로 만드는 기술을 총괄하는 개념인 패키징은 반도체 초미세화 공정이 한계에 다다른 이때 업계에서 중요도가 나날이 커져가는 분야다. 세계 3위 낸드플래시 업체인 일본 기옥시아도 올해 요코하마에 ‘플래그십 빌딩’과 ‘신-코야스 테크놀로지 프런트’ 등 두 개의 R&D 거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요코하마에 있는 전자 업계 R&D센터 중 R&D와 제조 시너지를 위해 클린룸이나 소규모 생산 시설을 갖춘 곳이 있는데 삼성전자 역시 이러한 형태의 사업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요코하마시는 R&D와 제조업을 결합한 ‘스마트 제조업’ 도시로의 전환에 속도를 낼 계획이다. 미나토미라이지구는 현재 96%가량 개발이 완료된 상태로 반도체·상사 기업들이 대거 위치한 ‘신요코하마’ 중심의 재개발 계획을 추진할 예정이다.
고바야시 히로아키 요코하마시 경제국 기업유치과 과장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요코하마시에 거점을 마련한다면 조성금과 세제 혜택 등이 뒤따를 것”이라며 “기업 유치 조례는 경제 상황에 맞춰 3년마다 수정되기 때문에 내년에는 반도체 기업에 특화된 촉진 정책이 마련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