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지속가능성에 대해 ‘그린워시(기업들이 친환경 이미지만 내세우는 기망 행위)’, 재정적 꼼수, 정치적으로 편향된 자유주의적 의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 냉소에 맞서 싸울 것입니다.”
이한상 한국회계기준원 원장은 17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국제 지속가능성 보고 세미나’에서 “모든 지속가능성 문제에 맞서야 한다”며 이 같이 강조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우리는 지구 온난화나 기후 붕괴 등의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며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마법의 지팡이는 아니지만 믿음직한 단짝(sidekicks)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원장이 이날 한국회계기준원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건 최근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 유럽, 미국의 연이은 관련 움직임에 국내 기업이 받는 압박감이 커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앞서 ISSB는 지난 6월 지속가능성 공시 관련 첫 기준인 IFRS S1(일반 요구사항)과 S2(기후 관련 공시)를 발표하면서 지속가능성 공시의 첫 포문을 열었다. 특히 협력업체 등의 탄소 배출량까지 공시하도록 하는 ‘스코프3’을 포함하면서 제조업 비중이 높은 국내 산업계를 긴장케 했다. 유럽연합(EU)도 이미 지난달 유럽지속가능성기준(ESRS)을 발표했고 미국의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올 10월 기후 관련 공시 요구사항을 공표할 예정이다. 기준의 실제 적용은 개별 국가의 자율에 맡겨지나 세계 무대에 제품을 판매하는 국내 기업 입장에서 주요 교역 대상국의 공시 도입 시기는 민감한 주제일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원장 외에도 참석자 대다수는 한국이 기업 활동과 관련한 지속가능성 정보를 일관된 기준에 따라 공시해야 한다는 데 강한 공감을 표시했다. 국제회계기준(IFRS) 재단 한국이사를 맡고 있는 이석준 농협금융지주 회장은 축사에서 “금융 시장을 통해 기후 관련 정보를 공급하고 지속 가능한 산업·기업을 중심으로 자금을 제공하면 국제 사회와 개별 국가의 탄소감축 노력을 배가할 수 있다”며 “감독 당국도 기업들과 충분히 협의해 인프라 구축, 인증체계 도입 등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옥스포드대 사이드 비지니스 스쿨 교수이기도 한 리차드 바커 ISSB 위원은 “ESRS는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모든 부문에 대한 상세한 기준을 구축했고 ISSB는 기후와 관련한 전반적인 기준을 도입했다”며 “두 기준을 상호 운용할 수 있는 지침을 곧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날 세미나에서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과 관련한 국제 사회의 흐름을 짚고 한국의 대응 역량 강화 방안을 치열하게 논의했다. 한국·일본·호주·미국 등 주요국의 지속가능성 공시 전문가와 규제 당국 관계자들은 △ISSB 기준 도입의 장단점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 간 상호 운용 가능성 △공시 기준과 관련된 각국의 향후 계획 등을 두고 의견을 나눴다. 백태영 ISSB 위원은 앞으로 2년 간 ISSB의 업무 계획에 대해 설명했고 징동 후아 ISSB 부위원장은 S1·S2 기준 관련 교육 자료를 개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폴 문터 SEC 국장은 SEC가 제안한 기후 관련 공시 규정안의 주요 내용과 단계적 이행 방안을 안내했다. 백 위원은 “최근 ‘ISSB와 SEC가 주도권 경쟁을 한다’는 말도 안되는 표현을 쓰는 국내 전문가도 일부 있다”며 “ISSB는 의무 공시를 강요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SEC 등과 협조하려는 기관”이라고 말했다.
각국의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 인식을 살핀 설문 조사 결과도 나왔다. 유고운 미시간대 교수는 각국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 제정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상당수 국가들이 이미 지속가능성 공시를 의무화했거나 앞으로 5년 이내 의무화할 계획이라고 응답했다”며 “투자자와 기업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기준 도입을 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우리 정부가 2025년 코스피 상장사 기준 자산 2조 원 이상 기업부터 ESG 공시를 의무화할 계획임을 재차 상기했다. 김 부위원장은 “자칫 기업의 경영 활동을 옥죄는 규제나 새로운 형태의 ‘무역장벽’으로 작용하지는 않을지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며 “정부는 국내 ESG 공시 제도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국제 사회의 논의와 국내 산업 구조의 특성, 기업들의 준비 상황을 균형 있게 고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