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相象(상상)’은 이웃나라 일본의 다양한 이슈를 전해드립니다. 아울러 한국과 닮은 사회적 현상·맥락을 짚어보고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DJ 소다(본명 황소희)가 지난 13일 일본 오사카의 음악 페스티벌 ‘뮤직 서커스23’에 참여했다가 성추행 피해를 입었다. 주최 측인 현지 공연기획사 트라이하드 재팬이 가해자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나선 가운데 이 사건이 불러일으킨 파장은 컸다.
한국에서는 주로 황씨의 ‘노출 의상’을 향한 비판이 줄을 이었다. 이에 대해 황씨가 “내가 어떤 옷을 입든 성추행과 성희롱은 결코 정당화가 될 수 없다. 노출이 있는 옷을 입는다고 그들이 나를 만지거나 성희롱할 권리는 없다”고 항변할 만큼 국내 여론은 끈질기게 옷차림만을 문제 삼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2차 가해에 해당한다.
사실 일본의 여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와 같은 성추행 범죄를 법률적·문화적으로 분석하는 언론과 전문가들이 눈에 띈다. 이들은 현지인들의 왜곡된 성인지와 구시대적 ‘피해자 탓하기’를 개선하려고 시도한다. 물론 범행이 일본에서 일어났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17일 닛테레뉴스(日テレNEWS)와 변호사닷컴 등 현지 매체는 이번 사건을 법률 전문가들의 의견을 인용해 집중 조명했다.
오사카변호사협회 등에 따르면 황씨의 신체를 만진 가해자는 일본 형법 제176조 ‘비동의 추행죄’를 위반한 것으로 보인다. 와카사 마사루 변호사는 “가해자가 고의로 만졌다면 비동의 추행죄가 성립될 것이다. 이 경우 기소돼 유죄가 인정되면 6개월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진다”며 “이전에는 ‘강제추행죄’로 불렸지만 지난달 형법이 개정돼 명칭이 바뀌었다. 이에 따라 죄가 성립되는 범위가 넓어졌다. 현재 일본에서는 성범죄에 대해 더욱 엄격하게 대처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오쿠무라 도오루 변호사도 “연예인의 노출이 심했다고 하더라도 가슴을 만지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며 “비동의 추행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또 일본 대법원은 2017년 11월 29일 비동의 추행죄(당시 강제추행죄)에 관해 논고를 남기기도 했다. 우스이 마유코 재판관은 “가슴과 엉덩이는 성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부위라고 할 수 있으므로 피해자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직접 만지거나 주무르는 행위 또는 행위자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피해자에게 직접 만지게 하는 행위는 성적인 성격이 강하다”며 “행위 자체가 가지는 성적 성격이 뚜렷해 즉시 음란한 행위로 평가할 수 있다고 할 것”이라고 해설한 바 있다.
게다가 황씨를 성추행한 가해자가 오사카부의 민폐방지조례를 위반했다고 판단할 소지도 있다. 오사카부 내에서 이는 ‘사람에게 현저하게 수치심을 주거나 불안을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의복 등 위에서 또는 직접 사람의 신체를 만지는 행위(비열한 행위, 오사카부 공중에게 현저하게 폐를 끼치는 폭력적 불량행위 등의 방지에 관한 조례 6조 2항 1호)’에 해당한다. 법정형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만엔(약 917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같은 날 현지의 제이캐스트뉴스는 황씨를 비난하는 여론에 관해 범죄심리학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해 보도했다.
오마타 겐지 스루가다이대 심리학과 교수는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의 배경으로 전통적 성역할 관념을 꼽았다. 그에 따르면 전통적 성역할 관념이란 ‘여성은 부드럽고 정숙하며 남성에게 순종적이야 한다’는 사고방식 그 자체다.
오마타 교수는 “2차 가해를 하는 것은 통계적으로 남성이 더 많다. 분명히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며 “‘강간 신화’라는 말이 있다. 여성의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피해자를 비난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강간 신화란 성폭행 피해자나 성폭행에 관한 편견과 잘못된 믿음을 뜻한다. 한국에서 성폭행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인식과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이어 그는 “예를 들어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으면 무슨 짓을 당해도 괜찮을 것 같다’ 혹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남성의 방에 가면 성관계를 용인하는 것이다’와 같은 관념”이라며 “아무 것도 단정할 수 없는데 그런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고 지적했다.
오마타 교수는 ‘여성은 성에 대한 태도와 행동이 정숙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성역할 관념이 여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한 DJ소다가 책임이 있고 그런 사람은 무슨 짓을 당해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며 “그렇지만 피해자의 옷차림은 (성범지와) 상관이 없다. 이는 인식의 왜곡이 불러일으킨 일”이라고 일축했다.
일본에서 비동의 추행죄가 성립된 것을 언급하기도 했다. 오마타 교수는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는데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게 핵심”이라며 “이런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큰 진전이다. 하지만 여전히 뿌리 깊은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그는 또 성범죄 피해에 대해서는 성적 자유를 존중하는 보도 등을 통해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다. 오마타 교수는 “급격한 변화는 어렵겠지만 조금씩이나마 바꿔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일본 언론들도 피해자를 탓하는 풍조를 인식해 이를 개선하고자 한다. 닛테레뉴스는 성폭력 문제에 정통한 오사와 마치코 일본여자대 명예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오사와 명예교수는 “일본은 피해자의 인권에 관한 의식이 유럽 등에 비해 낮다. 그로 인해 2차 피해를 낳고 있다”며 “인권을 존중하는 흐름 속에 비동의 추행죄로 그나마 제도적 보폭을 맞췄다. 나머지는 우리의 의식을 국제적인 추세에 부합하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씨가 “내가 어떤 옷을 입든 성추행과 성희롱은 결코 정당화가 될 수 없다”고 외친 지난 14일 일본의 유엔홍보센터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당신은 무엇을 입고 있었는가’라는 제목으로 영상을 게재했다. 이는 유엔본부에서 성폭행 피해자 103명이 피해 당시 입었던 옷을 공개한 전시회의 영상이다. 성폭행 피해자들 스스로 “옷차림이 문제가 아니다”라고 항의한 것이다.
성범죄에 대해 한국보다도 미온적인 일본조차 지난 6월16일 성범죄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참의원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성폭행 유죄 판결 조건으로 가해자의 폭행이나 협박, 피해자의 강한 저항을 요구하던 현행법에서 큰 진전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영국 BBC방송도 “강간에 대한 정의가 다른 나라와 동등해졌다”고 평가했다.
이를 통해 “동의 없는 성행위는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사회에 명확히 알리되 적용되는 8개 사례를 구체적으로 명시함으로써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해석되지는 않도록 했다. 폭행이나 협박뿐 아니라 술이나 약물 섭취, 수면 등으로 의식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 오랜 학대를 당했거나 사회·경제적 지위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경우 등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이게 된 경우에 적용된다.
한국 역시 성폭력 범죄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묻는 2차 가해 행위가 아직도 만연해 갈 길이 멀다.
실제로 국민의 절반가량이 ‘노출이 심한 옷차림이 성폭력 범죄의 원인이 된다’는 인식을 했다. 특히 남녀 모두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동일 연령대에서는 여성보다 남성이 이런 통념이나 편견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여성가족부가 만 19~64세 남녀 1만 20명을 대상으로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연구’를 한 결과, 응답자의 46.1%가 ‘성폭력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 때문에 일어난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이어 ‘금전적 이유나 상대에 대한 분노, 보복심 때문에 성폭력을 거짓으로 신고하는 사람도 많다’(39.7%), ‘피해자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면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32.1%), ‘키스나 애무를 허용하는 것은 성관계까지 허용한다는 뜻이다’(31.9%) 등 순으로 ‘그렇다’는 응답률이 높았다.
모든 문항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높은 응답률을 보여 남성의 고정관념이 상대적으로 강했다. 특히 성폭력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 때문에 일어난다(남성 52.1% 여성 39.7%), 키스나 애무를 허용하는 것은 성관계까지 허용한다는 뜻이다(남성 37.2%, 여성 26.4%)의 문항에서는 10%포인트 이상의 격차를 보였다.
피해자의 옷차림 등 행실을 성폭력의 원인으로 몰아세우는 ‘피해자 탓하기’는 피해자로 하여금 정신적·신체적 손상을 가져오는 행위다. 따라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규정하는 대표적인 ‘2차 피해’ 행위로 꼽힌다.
다수의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법원은 “성폭력을 피해자의 평소 행실 탓으로 돌리는 주장”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는 사유로 삼을 수 없는”(청주지법 2021노94) “상당한 2차 피해”(서울중앙지법 2019고정215)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가부는 “전반적으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과 피해자다움에 대한 인식, 피해자에게 성폭력 피해의 책임을 돌리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 이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의 원인을 '피해자 유발론'으로 파악했다. 장미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젠더폭력연구본부 선임연구위원은 "2차 가해는 결국 피해자에게 책임 소지가 있다는 인식, 즉 피해자 유발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온라인상의 2차 가해 문제가 심각하다고 봤다. 장 연구위원은 "(2차 가해가) 현재는 온라인상에서 공간적 한계를 벗어나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자의 이야기가 오르내리게 된다"며 "피해자로서는 최초의 성폭력 피해가 영속적으로 반복되는 공포를 느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장 연구위원은 "최초 성폭력 가해자에 비해 온라인상의 2차 가해자는 워낙 수가 많고 광범위해 처벌도 어렵다는 것이 문제"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인식 변화를 촉구했다. 장 연구위원은 "사실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도 강화되고 피해자에 대한 지원 제도도 강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2차 가해가 만연한 데에는 우리 사회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며 "(성폭력이) 피해자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문제라고 보는 인식,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