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창업기획자(액셀러레이터) 중 박사급 전문 인력을 채용한 곳은 사실상 전무한 수준입니다. 창업가들에게 헛된 희망만 잔뜩 불어넣고 떠나게 됐네요.”
국내 유명 액셀러레이터에서 근무하다 퇴사한 A씨는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창업 생태계의 현실에 대해 작심토로 했다. 이공계 박사 출신인 A씨는 국내 대기업과 공공 연구기관에서 근무했다. 창업가를 발굴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왔지만 현실은 예상과 한참 달랐다. ‘영세 자영업자들’이 딥테크 창업 기업을 육성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모습을 볼 때면 자괴감마저 들었다고 한다. A씨는 “무슨 기술을 활용해 창업을 했는지 검증도 못하는 액셀러레이터가 창업가를 키운다는 것은 넌센스 아니냐”고 반문했다.
A씨와 같은 내부 비판이 업계에서 끊이지 않는 것은 창업기획자 진입장벽이 지나치게 낮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자본금 1억 원과 전문 인력 2명만 있으면 누구나 창업기획자가 될 수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창업기획자는 417곳에 달한다. 2017년 56개에 불과했지만 5년 새 8배 가까이 늘었다.
문제는 이처럼 무분별하게 늘어난 창업기획자 상당 수가 정부 지원금에 의존해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창업기획자 업계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정부 지원 사업 몇 개만 따내면 인건비 정도는 해결할 수 있다”며 “본인 돈 없이도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 보니 보육 능력이 안 되는 인사들이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최근 양상이 다소 달라졌다. 정부가 모태펀드 규모를 축소하는 등 투자 혹한기가 장기화하자 오히려 라이선스를 반납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업계에서는 고사 위기라며 정부를 향해 각종 지원책을 요구한다. 법인의 개인투자조합 출자자(LP) 참여 한도 확대, 창업투자조합에 준하는 법인세 감면 등이 대표적이다. 준비가 안된 창업기획자가 무분별하게 늘어나면 결국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창업가들이다. 지금은 세제 혜택이 아니라 전문 인력 확보를 의무화하는 등 진입 장벽을 높여야 할 때 아닐까. 창업가를 위한 정부의 단호한 결단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