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민간 용병 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무장 반란을 일으킨 지 두 달 만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단순 사고사가 아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숙청’이라는 관측이 유력한 가운데 러시아 안팎으로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크렘린궁의 건재를 과시한 것이라는 평가 속에 되레 친바그너 세력의 반발이 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러시아 연방항공청은 23일(현지 시간)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엠브라에르 레거시 600’ 제트기가 트베리 지역의 쿠젠키노 주변에 추락했다고 밝혔다. 이어 “조사 결과 승무원 3명을 비롯해 승객 10명이 전원 사망했으며 탑승자 명단에 프리고진이 포함돼 있었다”고 사망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추락한 항공기는 바그너그룹 전용기로 프리고진의 최측근이자 바그너그룹의 공동 설립자인 드미트리 우트킨도 함께 사망했다. 크렘린궁은 아직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지만 러시아 사고 당국은 추락 경위와 관련해 이날 형사 사건 수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다만 실제 추락 원인이 기계 결함일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인다. 비행 추적 사이트 ‘플라이트레이더24’에 따르면 해당 항공기는 이륙한 지 몇 분 만인 오후 6시 11분께 위치 정보가 끊겼다. 이후 10여 분간 마지막으로 기록된 고도, 수직 속도 데이터 등에 따르면 항공기는 돌연 불규칙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다 분당 8000피트(약 2.4㎞)에 가까운 속도로 추락했다. 이에 플라이트레이터24는 “(비행 마지막 순간에) 무슨 일이었든 매우 빠르게 일어났다. 추락 전에 항공기에 문제가 있다는 징후는 없다”고 분석했다. 로이터통신도 “지난 20년간 해당 기종에서 발생한 사고는 단 한 건뿐이며 이조차 관제 시스템 문제 때문이었다”고 전했다. 이날 온라인상에는 한쪽 날개가 떨어진 비행기로 추정되는 물체가 수직으로 추락하는 영상이 확산되기도 했다.
이에 정치적 보복이자 숙청이라는 관측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다. 친바그너 텔레그램 채널 그레이존은 러시아군 방공망이 항공기를 격추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역시 이날 취재진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나는 놀랍지 않다"며 예견된 일이라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영국 텔레그래프도 정보 당국 소식통을 인용해 “당연히 푸틴의 지시에 따른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소행으로 추정된다”며 “모든 배경과 습성·과거가 FSB를 지목한다”고 전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내년 3월 대선을 앞둔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엘리트를 향한 경고’를 보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프리고진의 반란과 연계됐다는 소문이 돌며 자취를 감췄던 세르게이 수로비킨 러시아 항공우주군(공군) 총사령관이 전날 돌연 해임된 것도 숙청설에 힘을 실었다.
향후 파장에 대해서도 다양한 전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푸틴이 자신의 가장 효과적이고 잔혹한 군사 지도자 두 명 없이도 전쟁을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분명 제기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프리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바그너그룹이 수장을 잃어 이곳에서 권력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바그너그룹의 미래에 대해 BBC는 프리고진의 죽음이 ‘순교’로 평가되며 그의 수하들이 봉기할 가능성을 거론했다. 반면 러시아 정부가 프리고진을 대신해 조직 장악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과 함께 바그너그룹이 사실상 해체 수순에 들어갈 것이라는 전망도 흘러나온다.
프리고진은 올해 6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동부 요충지 바흐무트를 점령하는 등 결정적인 공을 세웠지만 점차 군 수뇌부의 지원 부족에 불만을 품고 공개적인 비판을 일삼는 등 대립각을 세우다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벨라루스 측의 중재로 반란은 즉각 중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