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커튼콜] 록 뮤지컬, 더 즐겨봐…우리는 자유로우니까



10만 원 넘는 돈을 내고 뮤지컬 공연장에 갔는데 앞사람 키가 너무 커 두 시간 넘게 고개만 기웃거리다 온 적 있나요? 배우의 노래뿐 아니라 숨소리까지 여운이 남아 같은 돈을 내고 본 공연을 또 본 적은요? 그리고 이런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 혼자만 간직하느라 답답한 적은 없나요? 세상의 모든 뮤덕(뮤지컬 덕후)의 마음을 대신 전하기 위해 뮤덕 기자가 나섰습니다. 뮤지컬 애호가를 위한 뮤지컬 칼럼, ‘어쩌다 커튼콜’과 함께하세요.





“오, 트레이스 유(Trace you)/모든 게 사라져도, 오 트레이스 유/난 너를 포기 못 해!”


지난 20일 성대하게 막을 내린 뮤지컬이 있습니다. 5월 11일부터 링크아트센터 벅스홀에서 10주년 공연을 올렸던 뮤지컬 ‘트레이스 유’인데요. 사실 덕후들에게 ‘트레이스 유’는 시끄러운 뮤지컬로 유명합니다. 처음으로 이 소문난 뮤지컬을 본 저는 도대체 얼마나 큰 소리가 나기에 그러한 풍문이 돌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기타의 화려한 소리와 배우들의 짜릿한 록 창법이 보는 내내 귀를 감쌌더랬죠.



뮤지컬 '트레이스 유' 10주년 공연 사진. 사진 제공=스튜디오 선데이

‘트레이스 유’는 록 장르로 구성된 넘버가 대부분인 만큼 전형적인 록 뮤지컬로 꼽힙니다. 사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우빈’과 ‘본하’ 모두 작은 록 클럽 ‘드바이’에서 지내는 보컬과 기타리스트이기도 하고요. 귓가를 때리는 넘버로 구성된 이야기의 플롯은 사뭇 간단해 보입니다. 보컬인 본하는 한 여자와 만나게 된 후 그가 드바이에 오기를 매일 기다리게 됩니다. 하지만 여자는 오지 않고, 본하는 좋아하던 록도 부르지 않고 공연을 무산시키기 일쑤죠. 함께 클럽에서 지내는 우빈은 “내가 널 언제까지 봐줄 것 같냐”면서 본하를 윽박지르지만, 그는 요지부동입니다. 이 간단한 이야기 속에서 본하의 그녀는 결국 드바이를 찾아오게 될까요.


공연을 들어가기 전 아기자기한 안내문 속에서 ‘딸기맛 나는 초코바나나 우유도 객석에 가지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를 발견한 관객도 있으실 텐데요. 이 우유는 본하의 그녀가 매일 편의점에서 사 가던 음료입니다. 어떻게 딸기맛과 초코바나나맛이 함께 느껴질 수 있을까요. 사실 이 말도 안 되는 맛의 우유는 작품이 간직하고 있는 반전의 서막이기도 합니다. 공존할 수 없는 맛의 우유처럼, 극 중 인물들의 이야기도 처음부터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내포하죠. 후반부 드러나는 놀라운 반전은 ‘트레이스 유’를 관람하는 묘미가 됩니다. 결말 또한 신선한데요. 배우들의 조합과 그날의 연기에 따라 매 회차 새로운 결말을 맛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죠. 우빈과 본하의 관계도 정해진 바 없이 다양한 경우의 수를 관객들에게 전시합니다. 이들은 함께할 수도, 적대할 수도, 혹은 그 언저리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도 있죠.



뮤지컬 '트레이스 유' 10주년 공연 사진. 사진 제공=스튜디오 선데이

난해하고 어려운 이야기지만 록의 매력으로 객석에서도 신나는 흥을 만끽하기 쉽습니다. ‘나를 부숴봐’라는 넘버의 가사는 모든 고통을 음악으로 승화하는 록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나는 내 멋대로 할래, 나를 부숴봐!” 공연 중간과 커튼콜에서 관객과 배우가 함께하는 떼창은 그야말로 록 콘서트를 소극장에 잠시 옮겨온 느낌을 주기도 했습니다.



록 뮤지컬, 자유와 혁명에 열광하다


그렇다면 록 음악은 어떻게 뮤지컬과 결합하게 되었을까요. 록 음악은 1950년대 미국의 ‘로큰롤’ 장르를 토대로 발전한 음악입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음악 장르였던 블루스를 가져와 변형한 것인데요.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 보컬로 이뤄진 밴드의 형태가 익숙하죠. 1950년대 로큰롤을 이끈 아이콘으로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꼽힙니다. 마침 엘비스 프레슬리의 시대와 로큰롤 음악을 다룬 뮤지컬이 충무아트센터에서 상연 중이기도 합니다. 뮤지컬 ‘멤피스’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을 처음으로 라디오에 송출한 기념비적인 인물 DJ 듀이 필립스의 실화를 각색해 만든 작품입니다.



뮤지컬 '멤피스' 공연 사진. 사진 제공=쇼노트

인종 차별 정책이 엄격했던 미국의 남부 도시 멤피스에서, 듀이를 본딴 캐릭터 ‘휴이’는 흑인 음악을 백인 사회에 전달하는 가교 역할을 자처합니다. 그 전까지 로큰롤과 블루스는 흑인만이 누릴 수 있는 음악이었습니다. 백인들이 향유하기에는 저급한 음악으로 분류됐죠. 그러나 휴이는 인종에 따라 문화 양식을 나누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발버둥칩니다. 사랑도 예외는 아니었죠. 작품 속에서 휴이는 흑인 가수인 ‘펠리샤’를 향한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을 노래하죠. 기존의 당연한 것들을 거꾸로 뒤집으며 노래의 힘을 전파하려는 그의 노력은 젊은 세대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음악 시장의 저변을 확대하는 계기가 됩니다.


1960년대 미국은 냉전에 들어서고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사회적으로 삼엄한 분위기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긴 법일까요. 이 같은 분위기에 맞서려는 흐름이 거세게 일고,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등 희대의 밴드들이 등장한 록 음악은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게 됩니다. 브로드웨이에서 한창 발전을 거듭하던 뮤지컬도 록 음악의 영향권 안에 들어서게 되고요.


록 뮤지컬의 시초로는 1968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을 올린 ‘헤어’가 꼽힙니다. 오페라에서 출발해 아름다운 음악과 이야기가 조화를 이루는 기존 뮤지컬계에서 누드로 배우가 출연하고 욕설이 등장하는 등 파격을 낳은 작품이죠. 보헤미안적인 삶을 사는 히피 그룹이 베트남 전쟁에 징집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 편의 거대한 반전(反戰)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평가받습니다. 세상의 틀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고뇌하는 젊은이들의 날카로운 청춘을 담아내기에 록 음악만큼 제격인 방식은 없었습니다.


"그녀는 내게 왜 털이 무성하냐고 물어요, 나는 낮에도 밤에도 털이 많죠. 무서운 일이지만 나는 도처에 털이 나 있어요. 왜냐고 묻지 마요, 나도 알지 못하니까……. (뮤지컬 ‘헤어’ 중 넘버 ‘헤어’의 일부)



‘헤드윅’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록 뮤지컬·오페라의 명작



뮤지컬 '헤드윅' 중 배우 조승우의 공연 사진. 사진 제공=쇼노트


뮤지컬 ‘헤드윅’은 조승우, 오만석, 조정석 등 당대 뮤지컬 스타들이 거쳐 간 굵직한 작품입니다. 성전환에 실패한 트랜스젠더 로커의 이야기를 다룬 록 뮤지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기도 합니다. 유례 없이 독특한 캐릭터를 맡은 배우들이 파격적으로 이미지 변신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미국에서 1998년 첫 정식 공연 후 영화화도 이뤄지는 등 성공을 거뒀고, 한국에서는 2005년에 처음으로 라이센스 초연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2021년까지 장장 열세 번째 시즌을 거친 만큼 한국인들에게도 사랑받는 뮤지컬로 자리매김했는데요.



뮤지컬 '헤드윅' 중 배우 오만석의 공연 사진. 사진 제공=쇼노트

작품 속에서 1988년 동독에서 암울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던 소년 ‘한셀’의 희망은 오직 록을 통해서만 반짝입니다. 하지만 여자가 되려고 했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또 다시 절망에 사로잡히는데요. 한셀은 ‘헤드윅’이란 이름으로 개명한 후 록 밴드에 몸을 담고 스스로를 치장하면서 온전한 자아를 완성하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사회의 차별받는 시선 아래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운명의 상대를 찾아 헤매던 헤드윅은 사랑하는 남자 ‘토미’에게 배신을 당하고, 불안정한 분노를 쏟아내며 자기 자신을 소모합니다. 하지만 마침내 자신을 떠나간 토미에게 리프라이즈 넘버 ‘Wicked Little Town’을 듣게 되며 오롯한 자신을 바라보게 되죠.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 2’에서 체호프 연극의 여주인공 ‘니나’를 꿈꾸던 탈영병이 ‘헤드윅’의 넘버 ‘Wig in a Box’와 ‘Midnight Radio’를 부르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록 오페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록의 형식으로 예수를 다룬 파격적인 작품이죠. 1971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작곡한 뮤지컬로, 예수의 마지막 7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저스’는 샤우팅 창법을 구사하면서 인간 사회에서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그 파격적인 접근으로 인해 기독교 보수 단체의 항의를 부르기도 한 작품이지만, 저항을 상징하는 록을 통해 예수의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대표하는 넘버 ‘겟세마네’는 배우 마이클 리의 버전이 매우 유명합니다. 그 고난이도의 샤우팅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모습이라니요!)


누군가는 록의 시대가 영원할 것이라고 했던가요. 최근 힙합이 록의 자리를 대신하며 큰 파급력을 자랑하게 됐지만, 아직 뮤지컬에는 자유와 해방의 정신을 강렬하게 노래하는 록이 굳건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록은, 아마도 늘 어렵기만 한 현실 속에서 오늘도 한 걸음 전진을 꿈꾸는 이들의 목소리를 가장 잘 전달하는 수단이기 때문일 테죠.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