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트기 3대 갈아타고 목적지 급변경…프리고진, 암살 위험 알고 있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포로홉스코예 공동묘지'에 조성된 프리고진 묘소.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향해 무장반란을 일으킨 뒤 지난 23일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목숨을 잃은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생전에 암살 위험을 느껴 치밀하게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항공기 추적 서비스인 플라이트레이더24가 제공한 지난 2020년 이후 프리고진의 비행 기록을 분석했다.


신문은 프리고진이 제트기 추락 사고로 숨지기 오래전부터 이미 항공기가 자신의 암살을 위한 무대가 될 수 있다고 의심하면서 전용기에 각종 방어 장비를 설치하고 비행경로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전직 러시아 공군 장교, 바그너 출신 용병, 프리고진의 비행 일정을 알고있는 관계자 등을 인용해 “프리고진은 점점 늘어나는 추적자들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했다.


프리고진이 자주 이용한 전용기는 브라질산 '엠브라에르 레거시 600' 제트기였다.


아프리카 동부 인도양 섬나라 세이셸에 본사를 둔 프리고진 연계 회사가 지난 2018년 아일랜드해 브리튼 제도에 속한 영국 왕실령 맨섬에 등록된 회사로부터 이 제트기를 인수한 뒤 항공기 등록지와 관할지는 여러 차례 변경됐다.


제트기에는 외부 추적을 감지할 수 있는 장비, 전자 차단 스마트창 등의 보안장치가 설치돼 있었다.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차량 내부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 사진은 아프리카에서 촬영됐을 가능성이 있으며 지난 31일에 공개됐다. 로이터 연합뉴스

주로 모스크바 북동쪽의 츠칼롭스키 공군기지나 인근의 민간 공항에서 출발한 그의 제트기는 비행경로 추적을 피하기 위해 자주 '트랜스폰더'(항공교통 관제용 자동 응답 장치)를 껐다.


가짜 여권을 소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승무원들은 이륙 직전 승객 명단을 수정하거나 비행 중에 관제 센터와 교신해 갑작스레 목적지를 변경하기도 했다.


프리고진은 바그너 용병들이 주둔하고 있는 아프리카 국가들로 갈 때는 2~3대의 제트기를 갈아타는 치밀함을 보였다.


바그너 그룹이 국방부를 비롯한 러시아군 지휘부에 반대해 일으킨 지난 6월의 무장반란이 실패로 끝난 뒤 프리고진은 주변 보안 조치를 한층 강화했다.


러시아군과 연계된 모스크바 공군기지나 다른 군용비행장 이용을 중단했고, 비상사태부가 제공하는 정부 제트기도 이용하지 않았다.


지난 8월 아프리카로의 마지막 여행 때는 모스크바에서 30km 이상 떨어진 한적한 민영공항을 이용했고, 항공기가 이륙하기 직전에야 승객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지난 24일(현지시간) 전용기 추락 사건이 발생한 러시아 트베리 지역의 쿠젠키노 마을 근처에서 인부들이 희생자 시신을 옮기고 있다. 러시아 용병 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과 측근 드미트리 우트킨 등 10명이 전날 이 사건으로 사망했다. AP 연합뉴스

하지만 이처럼 치밀하고 철저한 예방 조치들도 그를 파멸로부터 구해내지 못했다.


아프리카로의 마지막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지난 23일 모스크바에서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기 위해 엠브라에르 레거시 600 제트기에 몸을 실었고, 항공기는 이륙 직후 추락했다.


추락 지점은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방향으로 약 300㎞ 떨어진 트베리 지역의 쿠젠키노 마을로 푸틴 대통령의 호화 관저가 있는 발다이 지역에서 약 50㎞ 떨어진 곳이었다.


프리고진을 비롯한 탑승객 10명은 신원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불탄 채 사망했다.


잡범 전과자에서 유력 사업가로 변신해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가 되고 결국엔 '보스'에게 도전한 내부 배신자로 낙인찍히기까지 영욕의 삶을 산 그는 29일 가까운 친지와 지인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묘지에 묻혔다.


러시아 당국은 제트기 추락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지만 아직 그 원인과 관련한 아무런 발표도 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사고 현장 보존에 관한 국제 안전 규정을 무시하고 추락 현장을 불도저로 밀어버렸다고 WSJ은 전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