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가 최종적으로 홍범도 장군 흉상을 학교 밖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함께 이전이 검토됐던 지청천·이범석·김좌진 장군과 이회영 선생, 박승환 참령의 흉상은 육사 교정 내 다른 장소로 옮긴다. 육사 측은 “기념물 재정비는 육사 졸업생과 육사 교직원 등의 의견을 들어 육사의 설립 목적과 교육목표에 부합되게 육군사관학교장 책임 하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육사가 이념 논쟁을 자초하면 논란을 빚었지만, 당초 의도대로 흉상을 육사 외부로 내몰 수 있게 됐다. 이게 끝이 아니다. 홍 장군과 관련해 언제든 논란이 증폭될 민감한 이슈가 줄줄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홍범도 장군의 이름을 딴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 함명 변경 △추가 서훈 재검토 △육군사관학교 명예 졸업장 문제가 대표적이다. 이 문제들 역시 후속 조치가 이뤄질 것으로 보여 또 다른 시한 폭탄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해군 214급(1800톤) 잠수함인 '홍범도함'의 함명 변경 여부가 단연 뜨거운 감자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불을 지폈다.
한 총리는 지난달 31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기동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홍범도함 함명 변경을 검토하느냐”고 묻자 “우리의 주적과 전투해야 하는 군함을 상징하는 하나의 이름이 공산당원이었던 사람으로 (이름을) 하는 것은 적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수정을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앞서 군 당국이 먼저 내부적으로 엇박자를 보였다.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에서 불거진 홍범도함 함명 변경 여부를 두고, 지난달 28일 국방부 정례 브리핑 자리에서 국방부와 해군도 시각차를 드러냈다. 당시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육사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면 잠수함 홍범도함 이름도 바꾸느냐’는 질문에 “검토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검토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장도영 해군 서울공보팀장(중령)은 브리핑 중간에 “(홍범도함) 이름 변경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국방부와 해군이 공개브리핑에서 엇갈리는 주장을 한 데 이어, 국무총리와 국방부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논란이 확산되자 군 당국은 당혹스러운 표정이다. 1일 정례브리핑에서 국방부 관계자는 “함명 변경을 검토한 바 없고, 상부로부터의 지시도 없었던 걸로 안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이 관계자는 “(총리 발언은) 앞서 국방부가 ‘필요하면 검토하겠다’고 밝힌 입장과 같은 맥락인 것 같다”고 주장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해군의 1800t급 잠수함 ‘홍범도함'의 배 이름 변경 검토 필요성을 언급했지만 하루 만에 국방부는 함명 변경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태세를 전환했다.
홍범도함은 해군의 214급(1800t급) 잠수함 가운데 7번째 만든 잠수함이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 2월 함명이 제정됐다. 당시 해군은 “홍범도 장군의 이름을 최신예 잠수함 함명으로 정함으로써 장군의 애국심을 기리고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함정 명칭 변경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해군 함정 명칭은 함명 제정위원회에서 선정한다. 독립유공자나 호국 영웅 가운데 전투 공적과 국민적 인지도·선호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한다.통상 해군의 핵심 전력인 구축함은 국난 극복에 기여한 호국 인물을, 잠수함에는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붙여 사용한다. 도산안창호함, 안중근함, 유관순함 등도 이 같은 방식을 따랐다.
창군 이래 함정 명칭 바꾼 전례도 없다. 함정 명칭을 밀어붙인다면 흉상 이전에 이어 군과 정부는 또다시 이념 논란을 자초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한 총리가 과도하게 의욕을 부렸다는 주장한다. 정부가 어떻게 수습해 갈지 주목되는 대목이다.
또 다른 뇌관은 홍범도 장군의 ‘이중 서훈’ 문제다.
장군은 박정희 정부 때인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고,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1년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동일한 공적에 훈장을 거듭 수여하지 않는다는 상훈법에 어긋난다는 게 국가보훈부 판단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른 시일 내에 홍 장군이 추가로 서훈을 받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대해 국가보훈부가 재검토에 들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동일한 공적에 대해 훈장을 거듭 수여하지 않는다’는 상훈법 4조에 어긋나고 이를 결정한 문재인 정부 당시 절차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2021년 문재인 정부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카자흐스탄에서 송환한 것을 계기로 기존 훈장보다 높은 대한민국장을 또 추서했다. 보훈부 관계자는 “조만간 공적심사위원회에서 재검토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 건국에 큰 공로가 있는 인물에게 수여한다. 홍 장군이 추가로 서훈을 받으면서 사유로 △일제하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으로 민족정기 선양 △한국과 카자흐스탄 간 우호 증진에 기여의 공적만 나열됐다.
중복 서훈자는 홍범도 장군 혼자만이 아다. 총 1만1710명 가운데 중복 서훈자는 홍범도 장군·여운형 선생과 유관순(1902~1920) 열사까지 총 3명이다. 유관순 열사는 1962년 받은 독립장이 급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에 ‘3·1운동 100주년’인 2019년 여야 정치인의 요구와 국민 청원 등으로 대한민국장이 추가됐다. 국민적 합의로 추서된 유관순 열사와 달리, 홍범도 장군·여운형 선생은 정당한 절차를 건너뛰고 일방적으로 추서된 측면이 있다는 게 보훈부이 판단이다.
박민식 보가보훈부 장관도 “당시 청와대의 강력한 의지가 개입돼 중복 서훈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며 “최소한 두 번째 받은 그 훈장에 대해서는 절차적으로 저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장관은 중복 서훈을 받은 홍 장군과 여운형 선생에 대해 서훈 공적심사위원회를 열어 타당성에 대해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활동을 이유로 육군사관학교 내 설치된 홍 장군 흉상을 철거하면서, 홍 장군의 육사 명예졸업장에도 관심이 쏠린다.
육사는 지난 2018년 6월7일 ‘봉오동 전투 전승 98주년 기념 국민대회’에서 홍범도 장군에게 명예졸업장을 추서했다.
명예졸업증서에는 받는 사람이 ‘홍범도 애국지사’로 적혀 있다. 수여 이유로 “귀하께서는 독립군의 일원으로서 조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다하셨으며, 특히 독립전쟁 중 몸소 보여주신 숭고한 애국심과 투철한 군인정신은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관생도들에게 참다운 군인의 귀감이 되었으므로, 이에 육군사관학교 학칙에 따라 명예졸업증서를 드립니다”라고 명시했다.
군 당국은 명예졸업증서 수여 의미를 “우리 국군이 홍범도 장군의 위업과 독립전쟁의 전통을 계승해 호국정신으로 승화시키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흉상 논란이 불거지면서 육사 총동창회를 중심으로, 홍 장군의 육사 명예졸업장은 육사의 정체성에 맞느냐는 의문이 뒤따르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방부는 지난달 28일 입장문을 내고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공산당의 사주를 받고 불법 남침하여 6·25 전쟁을 자행한 엄연한 사실을 고려할 때 공산주의 이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하여 기념하는 것은 육사의 정체성을 고려시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육사 총동창회도 지난달 29일 ‘입장문’을 내어 “6·25 전쟁을 일으키고 사주한 북한군, 중공군, 소련군 등에 종사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한 사실이 분명히 확인된 인물의 흉상에 육사 생도들이 거수경례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육사 측이 명예졸업증서 역시 회수되거나 취소돼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은 논란을 의식한 듯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역시 국방부는 원론적인 입장을 내놓고 있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홍 장군 명예졸업장 취소 여부는 “제가 답변드릴 사안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동석한 육군 관계자는 “관련 내용은 육사 예규에 따라 육사가 결정하고 판단하면 되는 부분”이라며 “현재는 수여된 졸업증명서와 관련해 정해진 게 없는 것으로 안다”며 여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