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배터리 기업들이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루프홀(법·제도 등의 허점)을 적극적으로 파고들고 있다. 미국에 합작사를 설립하거나 기술제휴 방식을 통해 배터리 공장을 지으며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미국 내에서 중국 기업의 진출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미국 역시 자국 전기차 산업의 생태계 조성을 위해 중국산 배터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미중 양측의 이해관계가 충족돼 중국 기업의 미국 우회 진출이 늘어날수록 중국과 경쟁 관계인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중국 배터리 업체 궈시안(고션하이테크)이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 리튬이온 배터리팩과 배터리셀 생산공장을 일리노이주에 짓기로 하면서 중국 기업들의 미국 투자가 주목받고 있다.
미국은 중국 기업이 자국의 핵심 산업에 직접 진출할 경우 안보 위협이 될 수 있다며 중국을 배터리 공급망에서 배제할 목적으로 IRA를 추진했다. 전기차 배터리는 물론 핵심 광물자원까지 틀어쥐고 있는 중국이지만 IRA 때문에 중국·유럽과 더불어 3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 진출에 어려움이 예상됐다.
중국 배터리 기업은 이 같은 난관을 자본 투자나 기술 지원 등의 우회 전략으로 뛰어넘고 있다. 중국 기업의 색채를 지우고 IRA 규정을 회피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만드는 동시에 미국 전기차 산업의 발전을 돕는다는 이미지까지 더해 적진을 공략하는 상황이다.
고션은 중국인 창업자가 세운 기업으로 본사가 중국에 있지만 폭스바겐차이나가 2021년 12월 26.47%의 지분을 확보해 최대주주가 됐다. 스위스 증시에 상장돼 대외적으로 중국 기업이 아닌 것처럼 포장한 고션은 내년부터 생산한 배터리를 북미 고객사에 납품할 계획이다. 고션은 지난해 12월 미국 완성차 업체와 2028년까지 200GWh의 배터리 공급계약도 체결했다.
미국 미시간주에도 공장 설립을 추진 중인 고션은 올 6월 미국 재무부 산하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로부터 공장 부지 매입이 국방물자생산법(DPA)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판단도 받았다. 위칭자오 중관춘 신형전지기술혁신연맹 사무총장은 “다른 중국 배터리 제조 업체와 고션을 크게 차별화하는 배경”이라며 고션이 최대주주를 독일 폭스바겐으로 둔 것이 미국 진출의 성공적 요인이라고 해석했다.
중국 이웨이리넝(EVE에너지)은 미국에 합작사를 설립하며 진출했다. EVE에너지는 다임러트럭, 미국 트럭 업체 커민스의 자회사인 일렉트리파이드 파워, 트럭 업체 팩카 등 3사와 손잡고 21GWh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짓기로 했다. 다임러트럭 등 3사가 지분 30%씩을 보유하지만 EVE에너지는 10%의 지분만 가지며 최대주주 논란을 비켜갔다. 이들 합작사는 27만 3000여 대의 전기차에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는 물량을 북미 시장 상용 전기차에 제공할 예정이다.
앞서 올해 2월 미국 포드는 중국 최대의 배터리 업체 닝더스다이(CATL)와 손잡고 미시간주에 배터리 공장 건립 계획을 밝혔다. 지난해 7월 포드와 향후 10년간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공급계약을 체결한 CATL은 12월에는 합작공장 설립에 대한 협의에 나섰다. 양 사는 포드가 배터리 공장의 지분 100%를 갖는 대신 CATL은 기술 라이선스를 제공하고 사용료를 지급받기로 했다.
올해 4월 미국에서 메르세데스벤츠와 BMW용 배터리 생산을 추진한다고 밝힌 중국 엔비전AESC 역시 중국 색채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며 북미 시장 전기차 업계의 물량 공급에 나설 계획이다. 이 업체는 일본 닛산자동차의 자회사로 배터리 부문을 담당하던 AESC를 중국 엔비전그룹이 인수한 것으로, 닛산이 2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