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서류 요구하고…불이행땐 보험금 지급 미뤄

◆위기의 손해사정업계 <하>보험사 부당행위에 '냉가슴'
자회사만 보고서 간소화 등
외부법인 차별 눈에 보여도
일감 끊길까 우려에 속앓이
당국 '모범규준' 만들었지만
강제성 없어 이행 한계 지적



경영난을 겪고 있는 중소 손해사정법인들이 대형 보험사의 부당 행위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보험사로부터 손해사정 업무 위탁을 받는 업의 특성상 일감이 끊길 것을 우려해 냉가슴만 앓는 실정이다. 금융 당국이 올해 7월부터 모범 규준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지만 강제성이 없는 탓에 한계가 있다고 손해사정 업계는 지적한다.


15일 손해사정 업계에 따르면 보험사들이 자회사 손해사정법인과 비(非)자회사 중소 손해사정법인을 차별하는 등 각종 부당·차별 행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한 손해사정법인 관계자는 “보험사가 자회사 손해사정법인에 요구하는 제출 서류와 외부 손해사정법인에 요구하는 내용에 차이가 크다”며 “이를 통해 보험사들이 외부 손해사정법인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형 보험사인 S 사의 경우 자회사 손해사정법인에는 글자 수 제한을 둬 조사 보고서를 간단하게 제출하도록 하고 있지만 외부 위탁 법인의 조사 보고서에는 제출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는 등 기준이 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조사 과정에서 부당한 지시를 내리고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보험금 지급을 지연하는 경우도 있다. 실손 청구를 하는 소비자에게 의료 자문 동의서를 받아오게 하고 이를 미제출하는 경우 보고서를 반송하거나 비용 지급을 보류하는 식이다. 한 손해사정법인 관계자는 “보험사 지시에 따르지 않아 손해사정법인이 보험사로부터 수수료를 받지 못하게 되면 결국 업무를 중지하거나 소비자에게 의료 자문을 하도록 유도할 수밖에 없다”며 “이 경우 보험금 지급이 지연되는 등 소비자 피해로 이어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보험사에 대한 민원 중 절반 이상이 보험금 산정이나 지급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외에도 자회사 손해사정법인에 위탁 업무를 맡겼다가 문제가 발생할 경우 외부 위탁 법인에 재위탁해 보험금 지급 시기가 늦어져 민원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고, 전산 등 인프라를 보험사와 동일한 수준으로 요구해 중소 손해사정법인의 부담을 키운다는 불만도 나온다. 이에 대해 보험 업계의 한 관계자는 “외부 위탁 법인에 고난도 사건을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쉬운 업무를 맡기는 경우가 더 많다”며 “낮은 수수료가 문제라고 하지만 흑자를 꾸준히 내는 법인도 많다”고 강조했다.


금융 당국 역시 이런 문제점을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올해 7월부터 ‘손해사정업무 관련 모범 규준’을 만들어 현재 시행 중이다. 다만 손해사정 업계에서는 모범 규준이 보험사와 손해사정법인들과의 강제성 없는 자율 협약인 만큼 업계의 잘못된 행태를 얼마나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고 있다. 강제성이 있는 관련 법 제정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지만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는 만큼 당국이 모범 규준을 잘 지키는지 감독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금감원 관계자는 “손해사정법인들이 처한 어려움은 당국 역시 인지하고 있다”며 “하지만 관련 법이 없는 상황에서 당국이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금융 당국은 향후 모범 규준을 바탕으로 보험 업계와 손해사정법인 업계가 함께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해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겠다는 방침이다. 당국 관계자는 “강제성이 없기는 하지만 모범 규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면서 “협의체가 구성되고 그 안에서 논의가 진행되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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