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발간된 올해 세계무역기구(WTO) 연례 보고서는 세계경제의 ‘분절화(fragmentation)’를 접고 WTO를 중심으로 ‘재세계화(re-globalization)’를 추구해야 함을 강조했다. 보고서는 공급망 취약성을 우려해 국내에서의 생산을 확충하는 것은 또 다른 취약점을 잉태하게 되므로 회원국들이 다양성을 높이면서 덜 집중된 공급망을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이 보고서는 지난 한 해 및 금년 초까지 WTO의 주요 활동을 요약해 제시하는 것이지만 눈에 띄는 내용을 찾기 어려웠다. 재세계화를 주장할 뿐 분절화를 방지하면서 재세계화를 추진할 방식에 대해서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올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대중국 정책 기조를 디커플링(탈동조화)에서 디리스킹(탈위험)으로 전환하기로 했지만 이에 대한 언급은커녕 디리스킹 시대에 재세계화를 위한 WTO의 역할에 대한 논의도 없었다.
더구나 미국·유럽연합(EU)·일본 등 선진국들이 중국 등 우려 국가에 대한 수출통제 제도를 강화하고 있고 중국은 쌍순환 정책(해외시장을 유지하는 동시에 내수 위주 자립 경제를 키워 경제를 발전시키는 전략)을 통해 자립 경제화를 추진하고 있어 재세계화 여건이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는 듯했다.
2022년 세계 상품 및 서비스 무역액은 31조 4000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지만 전망은 불투명하다. WTO는 올해 세계 상품 교역량 증가율이 1.7%로 지난해 2.7%에 비해 1%포인트 낮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내년에는 3.2%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불리한 정치경제적 요인, 즉 ‘다중 위기’로 인해 실제 증가율은 이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들 당사국은 물론이고 지리적으로 인접한 국가에 국경 조치, 무역 제재, 식량안보 및 에너지 정책 등에서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WTO는 분절화 영향이 심각할 정도는 아니지만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세계는 WTO 분석보다 빠르게 분절화 양상을 보이며 경제적 분열의 위험 수준은 점점 커지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G7과 중국·러시아 간의 대립 구도는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이 G7과 동맹국들을 중심으로 대중국 전선을 형성하자 중국은 브릭스(BRICS)를 확대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브릭스는 초기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등 5개 국가가 참여했다. 하지만 올 8월 남아공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가입을 신청한 23개국 중 이란·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에티오피아·아랍에미리트(UAE)·아르헨티나를 신규 회원국으로 승인해 총 11개국 체제로 늘어났다. 브릭스의 몸집 불리기는 미국이 주도하는 G7 체제에 대항하는 블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10년 전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을 통해 자국 중심의 경제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일대일로는 중국에서 동남아시아와 인도·아프리카를 거쳐 유럽으로 연결되는 육상 및 해상 수송로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로 미국의 중국 견제 정책을 돌파하기 위한 무역·투자·산업 정책이었다. 지난주 인도 델리에서 열린 세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미국은 인도·중동·유럽(IME) 회랑 전략을 발표했다. IME 회랑은 올해 G20 정상회의 의장국인 인도의 환심을 사기 위한 대책이면서 미국판 일대일로 정책이다.
경제안보 시대에 미국과 중국은 자국 진영을 확대하면서 결속력을 높이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어 앞으로 상당 기간 세계 통상 환경은 WTO의 역할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WTO 보고서에도 나타나 있듯이 저개발국의 무역 지원으로 중심 역할이 옮겨갈 것이다. 더구나 인도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및 남반구 개도국들은 글로벌 사우스라는 깃발 아래로 모이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는 북반구의 저위도나 남반구에 위치한 아시아·아프리카·남미·오세아니아의 개발도상국과 신흥국을 가리킨다. 내년 2월 중동 아부다비에서 열리는 WTO 각료회의(MC13)는 글로벌 사우스 지원 방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