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24년 대선에서 당선되면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전기차 전환 정책을 백지화하겠다고 공언하며 국내 기업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내 전기차·배터리 업계가 조 바이든 대통령의 전기차 보급 정책에 발맞춰 미국에 투자한 누적 금액만 해도 74조 원에 달할 정도로 막대해서다. 전기차 전환에 앞장서던 유럽연합(EU)도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등 속도 조절에 나서고 있어 국내 전기차 산업 전반에 적신호가 켜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바이든 대통령의 전기차 보급 정책이 ‘광기의 산물’이라 비난하며 “이 정책으로 전기차는 모두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미시간주의 위대한 자동차 산업은 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전미자동차노조(UAW)가 일자리와 자동차를 지키려면 나에게 투표해야 한다”며 “나는 이런 광기를 즉각 멈출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너럴모터스(GM)·포드·스텔란티스 등 미국 3대 완성차 제조사가 소속된 UAW가 파업에 돌입하자 표 몰이에 나선 것이다.
UAW는 단순한 임금 인상이 아닌 바이든 정부의 전기차 전환 정책을 문제 삼으며 대규모 파업을 시작했다. 전기차 전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 UAW의 문제의식이다. 전기차 1대 생산에 필요한 인력이 내연기관차 대비 약 30% 줄어드는 만큼 가뜩이나 미래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이 큰 와중에 바이든 대통령이 탈(脫)내연기관 정책에 집중하자 UAW의 우려가 극에 달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바이든 정부는 2032년까지 신차의 67%를 전기차로 판매하는 정책을 마련하는 등 전동화 전환에 속도를 내왔다. 미국 노동절인 4일에도 바이든 대통령은 북미산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주는 인플레이션방지법(IRA)을 대표 치적으로 언급했다.
바이든과 트럼프가 IRA와 전기차 전환 정책을 놓고 뚜렷한 시각차를 보이는 가운데 미 대선이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박빙으로 치러질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미국에 투자한 국내 기업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미 에머슨대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율은 59%로 한 달 전보다 9%포인트 상승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은 양자 가상 대결에서는 각각 45%의 지지율을 얻으며 팽팽하게 맞섰다.
국내 전기차·배터리 업계가 바이든 행정부 시절 미국에 쏟아부은 투자액은 총 74조 원에 달한다. 현대차(005380)그룹은 미 조지아주에 7조 8000억 원을 들여 전기차 신공장인 현대차그룹메타플랜트아메리카(HMGMA)를 세우고 있다. IRA 혜택을 누리기 위해 준공 시점을 앞당기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터리 업계도 막대한 투자를 확정했다. LG에너지솔루션(373220)은 HMGMA와 현대차·기아(000270)의 현지 공장에 공급할 배터리를 생산하기 위해 현대차와 5조 7000억 원을 공동 투입해 합작공장을 짓고 있다. GM·스텔란티스·혼다 등과도 함께 배터리 공장을 세우기로 합의했다. SK온 역시 현대차와의 배터리 합작공장 건설에 총 6조 5000억 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삼성SDI(006400)도 스텔란티스·GM과 합작공장 설립을 결정했으며 총투자 규모는 12조 원에 달한다.
완성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주정부 차원에서 전기차 전환 정책을 개별적으로 지속할 수 있지만 중앙정부의 기조가 바뀌면 전기차 보급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과거 행보를 돌이켜보면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은 그 자체로 기업의 불확실성을 끌어올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요 시장인 유럽마저 전기차 보급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20일(현지 시간)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 시기를 2030년에서 2035년으로 5년 늦춘다고 발표했다. 소비자에 과도한 부담을 강요한다는 이유에서다. 2030년을 목표로 전기차 전환을 서두르던 완성차 업계는 영국의 갑작스러운 계획 전환에 반발했다. 기아는 영국의 정책 변경에 실망을 표하며 “복잡한 공급망 협상과 제품 계획에 변화를 가져오고 소비자와 업계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현지에서 공장 두 곳을 운영하는 포드 또한 강한 어조로 영국 정부를 비판했다.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보조금을 무기화하려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프랑스 정부는 전기차 생산지별로 보조금을 달리 지급하는 내용의 보조금 개편안을 내년부터 시행한다. 유럽에서 생산되지 않은 전기차는 보조금을 거의 받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산 전기차를 견제하려는 목적이지만 국내 업계도 유탄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프랑스에서 1만 6655대의 전기차를 팔아 시장점유율 5위에 올랐는데 유럽 현지 생산 물량은 6571대로 40%에 불과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전기차 판매가 주춤하며 프랑스 등 유럽을 중심으로 자국 기업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며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특성상 핸디캡이 커질 수 있는 점을 염두에 두고 민·관이 함께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