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덕후라면 누구나 ‘입덕’작품이 있을 겁니다. 80~90년대 생이라면 입덕 작품이 대형작품이 아닐 가능성이 높죠. 한국에서 ‘오페라의 유령’이 처음 막을 올린 게 2001년이니까요. 오페라의 유령 개막으로 우리나라 뮤지컬 시장은 큰 전환점을 맞습니다. 해외의 대형 뮤지컬의 라이선스를 가져와 국내에서 국내 배우들이 해외와 거의 동일한 규모로 공연을 하는 방식은 공연을 처음 본 사람이든 공연을 자주 본 사람이든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사건이었으니까요. 사실 그 이전까지는 많은 작품들이 해외의 큰 공연을 라이언스 권리 없이 제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나라 뮤지컬 초기 시장에서 공연 마다 매진을 불러온 ‘창작 3인방’이 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공감할 만한 내용과 스토리로 한국적 정서를 담아 90년 대부터 지금까지 20년 이상 공연하는 자랑스러운 ‘롱런 작품’인데요. 오늘 커틀콜에서는 대학로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줄 세웠고 지금도 사랑 받고 있는 작품 세 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지하철 1호선’은 저의 대학 시절 ‘최애’ 작품이었습니다. ‘학전'이라는 극단 이름과 ‘아침 이슬’을 부른 극단 대표(김민기), 80년대 생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IMF’ 배경. 하나부터 열까지 낭만적이기 짝이 없는 이 작품은 저 뿐 아니라 당시 많은 2030세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작품은 연변 여성 ‘선녀’가 지하철 1호선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풍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여자 주인공의 이름부터가 몹시 예스럽습니다. ) 제작사는 작품을 '1998년 IMF 이후 서울의 모습을 무대 위로 옮겨 낸 풍속화’라고 소개 합니다. 실제로 이 문구는 무대 세트부터 등장인물, 대사 등 무대 곳곳에 적용됩니다.
사실 지하철1호선은 서울시내를 관통하는 지하철 중에서도 다소 특별합니다. 작품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인천과 서울을 잇는 유일한 노선 이었고, 잡동사니를 파는 상인과 취객,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대학생과 직장인들…천차만별의 사람들이 뒤엉켜 부딪히는 다른 지하철에서는 볼 수 없는 수많은 특별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작품은 그 지하철 1호선의 풍경을 날 것 그대로 담아냅니다. 실직 가장, 가출 소녀, 가짜 운동권 학생, 욕쟁이 할머니 등이 서울에 와 지하철 1호선에 몸을 싣게 되면서 겪는 수많은 이야기를 소개하는 거죠.
사실 이 작품은 독일이 통일된 이후 동독 여성이 서독에 와 지하철을 타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베를린 뮤지컬 ‘1호선’을 원작으로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각색 되면서 전혀 다른 작품이 되긴 했지만요. 작품성을 인정 받아 독일의 원작가는 2000년 부터 한국의 저작권료를 전액 면제했다고 합니다. 작품은 90년 대에는 시대상이 조금씩 반영돼 바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작사는 언젠가부터 그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이 뮤지컬을 ‘우리 사회의 풍속화'로 남겨두기도 했죠. 언젠가 누군가가 ‘뮤지컬 아카이브’를 해야 한다면 지하철 1호선은 당연히 가장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해야 할 것입니다. 조승우, 황정민, 장현성, 배해선, 방은지 등 기라성 같은 대배우들이 이 작품을 거쳐갔고, 수많은 기록을 세운 작품이기 때문이죠. ‘지하철1호선’은 오는 11월 10일부터 12월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2년 만에 다시 공연을 시작합니다. 아직 안 본 분들, 꼭 이번 기회를 노리세요.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빨래’를 한 번 본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많은 뮤지컬 애호가들에게 ‘몇 번을 봐도 한 번도 지루하지 않은 작품’을 꼽으라고 하면 세 손가락 안에 빨래를 넣을 것입니다. 빨래의 스토리는 얼핏 ‘지하철 1호선’과 비슷해 보이지만 두 작품은 시작부터 내용까지 모든 게 다릅니다.
빨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졸업작품으로 발표된 작품입니다. 그러다 2005년 국립극장 별오름에서 상업 작품으로 정식 초연한 이후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사랑 받고 있습니다. 지난 2012년 일본 진출을 시작으로 해외에서도 지속적으로 공연을 올리고 있는 명실상부 ‘K-뮤지컬’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 여파로 24차 프로덕션이 잠정 중단된 바 있지만 지금까지 5500회 이상 공연, 누적 관객 100만 명 돌파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지요.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동원된 대형 작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고작 300석 이하 규모의 소극장 뮤지컬이 ‘명성황후’ 등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창작작품과 동일한 결과를 끌어냈다는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빨래는 주인공 나영을 포함해 월급이 밀린 외국인 이주 노동자, 부당해고를 당한 직장 동료 등 우리 삶 속에서 만날 만한 이웃들이 서울에서 만나 아픔을 이겨내는 과정을 그립니다. 작품의 큰 인기 비결은 아무래도 ‘넘버’가 아닐까요. 작품의 주요 넘버 중 하나인 ‘서울살이 몇핸가요’는 한때 많은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온 대학생들의 사랑을 받는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그저 ‘노래가 좋다’라기 보다 어떤 세대든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담은 넘버 때문에 20대 연인들까지 손을 잡고 공연장을 찾는 작품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빨래는 오는 10월부터 2024년 5월까지 공연을 앞두고 있습니다. 작품은 스토리와 분위기 뿐 아니라 무대 장치까지도 여전히 아날로그 그 자체 입니다. 하지만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4050 세대에게는 향수를, 2030 세대에게는 낭만을 안겨주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사실 마지막 작품을 정하는 데 고민이 컸습니다. 좋아하는 대학로 창작 뮤지컬이 워낙 많은 데다 ‘사랑’을 주요 스토리로 하는 작품을 꼭 넣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번 주 커튼콜은 아직까지 공연이 열리고 있는 ‘롱런’ 작품을 주제로 하기로 한 만큼 ‘김종욱 찾기’, ‘사랑은 비를 타고(사비타)’ 등 제가 좋아하는 작품은 깨끗이 포기했습니다. 대신 제가 선택한 세 번째 작품은 ‘난타’ 입니다.
난타는 굳이 누군가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죠. 한국 전통 가락인 사물놀이 리듬을 소재로 주방에서 벌어진 일을 코믹하게 그려낸 한국 최초의 ‘비언어극’이기도 합니다. 1997년 10월 초연 당시 폭발적 반응을 일이켰고, 지금까지 한국 공연 사상 최다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죠.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북미와 유럽에서 수많은 해외 공연을 성공적으로 해낸 보기 드문 창작 작품이기도 합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는 아시아 최초로 1년 6개월의 장기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난타가 처음 등장했을 때 반응은 굉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틈만 나면 냄비를 뒤집어 두드리며 난타 흉내를 냈으니까요. 초연 때 난타를 보고 이후 난타를 보지 않은 분들은 ‘이게 왜 뮤지컬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뮤지컬은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처음 난타는 스토리가 없는 비언어 퍼포먼스였거든요. 그러다 1999년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참가해 호평을 받은 이후로 작품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퍼포먼스는 박진감을 높이고 스토리를 더하죠. 그리고 IMF를 겪고 있던 국민들의 시린 마음을 달래고 즐거움을 선사하며 명실상부 대한민국 대표 공연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난타는 최근 전국 곳곳에서 오픈런으로 공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 어린이 공연으로 변형돼 보다 많은 관객을 찾고 있죠.
사실 창작 뮤지컬 제작은 쉽지 않습니다. 손익분기점을 넘기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봐야 하는데 그러려면 톱스타 캐스팅과 화려한 무대가 필수입니다. 그래서 대학로에서는 한 명의 배우가 여러 작품에 동시에 출연하는 웃지 못할 일도 종종 벌어집니다. 그래서 자본이 중요합니다. 지금 티켓이 잘 팔리는 창작 뮤지컬은 대개 서구의 인물과 스토리를 중심으로 한 작품인데요. 우리에겐 더 많은 ‘지하철 1호선’과 ‘빨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뮤지컬 ‘찐팬’으로서 더 많은 제작자와 투자자들이 소극장 창작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