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암에서 조선 기자재를 생산하는 A사는 직원 20명 가운데 13명이 외국인이다. 국내 인력 채용이 힘든 상황에서 숙련된 외국인 인력 역시 구하기가 만만치 않다. 그나마 채용한 외국인도 급여를 조금이라도 더 주는 곳으로 이직하려 한다. 기업이 사실상 노동자와 외국인 브로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을’이 된 셈이다.
법무부는 25일부터 시행하는 ‘K-포인트 E74’ 제도가 기업체와 외국인 체류 근로자 간 ‘불안한 동거’를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숙련기능인력(E-7-4) 비자가 3만 5000명으로 확대되고 기업들이 외국인 근로자의 장기 체류 추천권을 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에도 장기 체류를 가능하게 하는 E-7-4 비자 추천권을 기업들에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고용노동부 등 소관 부서에만 권한이 있었고 국민 고용 창출 우수 기업 등 극히 일부 기업에만 허용됐다. 하지만 앞으로 일반 기업들에도 외국인 장기 체류 추천권이 주어지면서 산업 현장 인력 관리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이날 경기 과천 법무부 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외국인 근로자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단순노무 비자 외국인은 최장 9년 8개월이 지나면 불법체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며 “기업체 역시 외국인 근로자가 돈을 더 많이 벌고자 떠날까 봐 눈치를 봐야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조치가 “일정한 요건만 충족하면 거주 획득, 영주, 나아가 국적까지도 취득할 수 있게 해 대한민국과 자신이 일하는 기업의 발전에 기여하고 사회 통합에 힘쓸 동기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K-포인트 E74’ 제도 시행으로 우선 비자 쿼터가 1250명에서 3만 5000명으로 대폭 확대되고 기업들이 추천권을 갖게 되며 기존 우려는 불식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법무부의 판단이다. 비자에 추천되기 위해서는 한 기업에 1년 이상 다녀야 하고 비자를 받은 후에는 해당 직장에 2년 이상 의무적으로 근무해야 한다. 외국인 근로자들의 고용 안정성도 보장할 수 있을뿐더러 기업들 역시 안정적으로 숙련 인력을 채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 근로자들을 보호할 방안도 마련됐는데 만일 기업체가 임금 체불이나 인권침해 등을 벌일 경우 5년간 추천권이 박탈된다. 그 외 기업에 대한 다른 제한은 없다.
한 장관은 올해 전국을 돌며 현장의 의견을 수렴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7월 영암 현대삼호중공업과 전남도청을 방문하고 대한상의 제주포럼 강연에도 직접 참석했다. 또 광역지자체 의견 수렴과 경제단체와 민간연구소 관계자 간담회를 거치기도 했다.
추천을 받은 외국인 근로자가 구체적으로 비자 전환 대상자가 되려면 평가지표 총점 300점 만점 중 200점 이상(가산점 포함)을 받아야 한다. 점수 항목으로는 △평균 소득 △한국어 능력 등이 제시됐다. 한 장관은 “한국에서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정도의 소득과 한국어 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본다”며 “현장에 직접 다녀봤는데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한국어 공부를 할 동기부여를 해준다면 사회 통합 측면에서도 긍정적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초 한국어 능력은 선택 사항이었지만 필수 사항으로 바뀌었다.
기타 가산점은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자체가 추천하거나 인구 감소 지역 및 읍면 지역에서 3년 이상 근무한 외국인 근로자에게 부여된다. 불법체류자, 조세 체납자, 벌금 100만 원 이상의 범죄 전력이 있는 외국인 근로자는 대상에서 제외된다.
숙련기능인력 비자를 취득하면 동반 가족 초청 등도 가능해진다. 정부는 이번 제도가 단순히 노동 인력을 늘리는 일차원적인 정책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저출산이 장기화되는 인구절벽 상황에서 이민자를 적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작업은 필수불가결하고 이들이 적절하게 한국 사회에 통합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쫓겨나지 않는다’는 예측 가능성과 함께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안정성을 줘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법무부는 “단순노무(E-9 등) 인력으로 입국한 외국인 근로자도 능력 등이 검증되면 숙련기능인력 비자를 취득할 수 있고 그 후 5년 이상 체류·소득 등 요건을 갖추면 거주자격(F-2) 또는 영주권(F-5)까지 단계적으로 취득할 수 있다”고 시행 취지를 설명했다. 한 장관은 “인재 확보를 위한 세계 각국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법무부는 앞으로도 외국인 과학·기술 인재, 숙련기술인력이 대한민국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국익을 최우선으로 해 다양한 정책을 적시에 마련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숙련기능인력 전환 신청은 이날부터 하이코리아 홈페이지에서 온라인 전자 민원 방식으로 할 수 있다. 외국인 근로자가 직접 추천서와 추천자 신분증 사본을 제출하면 된다. 법무부는 추석 명절 이후 지원이 몰려들 것을 대비해 21명으로 구성된 전담 심사팀을 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