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정기국회에서 다뤄질 내년 예산안의 핵심 쟁점은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 감축이다. 정부의 R&D 예산안은 올해 31조 700억 원에서 내년 25조 9000억 원으로 급감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학기술원(KAIST), 광주과학기술원(GIST), 울산과학기술원(UN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등 4대 과학기술원도 평균 10%가량 정부 출연금이 감축되는 유탄을 맞았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자’고 외치는 임기철 신임 GIST 총장을 만나 대학의 R&D와 기술 사업화, 산학 협력, 인재 양성 구상을 들어봤다.
7월 취임한 임 총장은 25일 진행된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학이 실사구시 차원에서 산학 협력과 미래 성장 동력 확충에 적극 나서 성과를 내야 할 책무가 있다”며 “내년에 불요불급한 R&D는 뒤로 미루고 지역 경제 살리기나 미래 준비를 위한 연구 기획에 신경을 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내년 R&D 예산 삭감은 과학기술계에는 날벼락 같은 얘기이지만 과학기술의 미래와 국정 운영 측면에서는 이해할 만하기도 하다”고 했다.
-우선 GIST 총장직에 도전한 배경이 있다면.
△GIST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의생명, 에너지, 소재·부품·장비 분야 등의 교수가 220여 명으로 개인의 경쟁력만 놓고 보면 KAIST 못지않다고 본다. 하지만 한때 총장 유고 사태 등 리더십 공백과 노사 갈등으로 인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역 기업들과 함께 성장 동력을 창출하는 대학을 만들고 싶다.
-GIST를 간략히 소개해달라.
△올해 GIST 예산은 총 2801억 원(정부 출연금 1134억 원, 외부 수탁 연구 사업 1136억 원 등)이다. 학부와 석·박사 과정 학생은 2000여 명에 이른다. 올해 설립 30주년으로 세계적인 연구 중심 대학의 반열에 올랐다고 자부한다. 2015년에는 QS 세계 대학 평가 연구 부문(교수 1인당 논문 피인용 수)에서 세계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우리 대학들이 세계 대학 평가 기관의 평가에 매달리는 것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각 대학이 교육 혁신과 기술 사업화 등으로 차별화를 꾀해야 할 때 아닌가.
△맞다. 대학들이 국내 위상을 높이고 외국인 유학생 유치를 위해 대학 평가 기관에 로비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제 취임사에도 세계 대학 평가 100위권(국내 7위 이내) 도약을 목표 중 하나로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역 경쟁력과 대한민국의 미래 성장 동력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실질적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는 QS 통계 등을 인용한 홍보를 지양하겠다. 교육 혁신 측면에서도 패러다임을 바꾸겠다. 3학년 2학기부터는 프로젝트 중심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그래야 창업도 활성화할 수 있다. 학부생은 과학기술에 인문학·사회과학·예체능을 융합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신입생은 다른 과기원처럼 학과나 전공 구분 없이 뽑는다. 교수 평가 항목도 다원화해 강의, 창업, 산학 협력 및 기술이전에 각각 가중치를 두는 3개의 평가 방법을 짜고 있다. 3명의 교수가 한 달씩 돌아가며 강의하고 해외 석학의 강의를 온라인으로 듣게 하는 등 다양화하겠다.
-GIST를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끌고 가려고 하는가.
△그동안 풍족한 연구비를 쓰다가 결핍·내핍의 시대로 바뀌게 되는데 실사구시 연구에 초점을 맞추겠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한 단기 과제부터 미래를 준비하는 중장기 연구 기획까지 고루 신경을 쓰겠다. 불요불급한 R&D는 뒤로 미루고 자원의 효율적·생산적 배분을 추진하겠다. 아시아의 ‘AI 헤드쿼터’ 구축과 GIST 분원 설립, GIST홀딩스 설립, 연구·의료 장비 산업 기반 조성 등을 위해 노력하겠다. ‘혁신, 길이 없으면 우리가 만든다’는 게 GIST의 모토다. 정부 출연 연구 기관과도 협력을 확대해 12대 국가전략기술 분야에서 연구비를 늘리겠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연구단 2개 유치 절차도 밟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복안을 소개해달라.
△우리 경제는 현재 도약과 추락의 경계에 있다. R&D를 바탕으로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겠다. 가령 광(光)산업을 처음 시작한 곳이 광주광역시인데 활용처를 찾아 성과를 냈느냐 따져보면 미흡했다. 광산업 관련 R&D 장비와 기기 산업에 예산을 투입하면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레이저가 광산업의 핵심인데 드론을 잡는 데 쓰는 등 K방산에 기여할 수 있다. GIST는 군과 방산 업체 관련 연구도 확대하고 있다. 특히 광주에는 광산업 특화 단지가 있는 데다 GIST도 광학 분야에 강점을 갖고 있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나아가 광 기술을 적용한 의료 장비 개발로 나아가야 하는데 혁신 의료 기기의 경우 식품의약품안전처와 한국보건의료연구원 등에서 굉장히 보수적으로 대처한다. 국내 산업 보호와 육성에 도움이 되는 규제인지 적정성을 따져야 한다. 벤처기업과 제약·바이오사들의 원성이 보통 높은 게 아니다. 이게 바로 ‘규제 카르텔’ 아닌가.
-또 4차 산업혁명의 원동력인 AI와 반도체·소부장에도 역점을 두는 것으로 안다.
△저는 4차 산업혁명을 ‘4차 플러스 산업혁명’ 시대로 표현한다. AI가 플러스 역할을 해 생산성을 높인다. 광주는 소부장 특화 지구이고 AI와 반도체를 키우고 있다. 광주를 중심으로 범용 R&D 장비의 국산화에 박차를 가하면 연간 5000억~1조 원 상당의 외국산을 대체할 수 있다. 현재 정부의 R&D 예산 중 10% 가까이가 연구 장비 구입에 쓰인다. GIST를 아시아의 AI 중추 기관으로 만들자는 포부가 있는데 차별화를 위해 AI정책전략대학원을 만들려고 한다. AI 사회를 정착시키고 이를 경제 성과로 연결하려면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정치·경제·사회·문화·윤리·도덕·철학·휴머니즘까지 망라해야 한다. 기업과 연구산업협회가 같이 태스크포스를 꾸려 준비하고 있다. 물론 GIST는 상당한 AI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 정부의 ‘AI 반도체 특화 단지 조성 사업’과 연계해 광주의 대학들과 연구소들이 공동 활용할 수 있는 ‘차세대 AI 반도체 첨단 공정 팹’ 구축에도 참여하고 있다. 2027년에는 GIST 부설 AI영재고도 개교해 인력 공급 사다리도 완성할 예정이다. 반도체 분야의 경우 삼성전자 계약학과를 신설해 2024~2028년 매년 학·석사 통합 과정 학생을 30명씩 선발한다.
-KAIST와 포항공대(포스텍)는 의학전문대학원을 만들려고 하고 UNIST는 이달부터 한 학기는 울산대 의대 학생들을 받아 공학·의학 융합 교육에 들어간다.
△GIST는 의생명공학과를 운영하며 전임교수가 10명이다. 이 중 의사 출신도 있다. 마이크로바이옴과 항암제를 개발하는 지놈앤컴퍼니를 창업한 박한수 교수 등이 한 예다. 전남대 의대와의 공동 연구도 확대하려고 한다. 교원과 학생 교류 역시 시작할 것이다.
-전남대·전북대·조선대·원광대 등 호남의 의대와 한의대를 망라해 의생명과 공학을 융합할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 아닌가. AI·반도체·소부장 분야도 그랜드플랜이 필요하다.
△기존 의대에서는 의료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혁신 의료 기기와 장비, 제약·바이오 개발 등 첨단 바이오 분야의 발전을 위해 지역 내 의대와의 융합을 검토하겠다. AI든 소부장이든 산학 협력 확대가 필요하다. ‘1연구팀 최소 1기업 지원’을 주문하고 있다. 소부장만 봐도 지역에 괜찮은 벤처기업들이 많다. 그동안 AI·소부장·바이오헬스 분야에서 기업과의 협의체를 가동해 교수 20여 명과 기업인 59명이 활동 중인데 좀 더 내실화하겠다. 로컬(지역) 기반이 없는 글로벌(세계화)은 있을 수 없다.
-R&D 예산 감축으로 기부도 많이 받고 학교가 돈 버는 것도 늘리는 게 절실하겠다.
△GIST가 30년 동안 누적 300억 원의 기부를 받아 현재 100억 원이 남아 있다. 저도 매달 월급에서 200만 원을 발전기금으로 낸다. 오늘도 한 중소기업 회장과 1억 원 유치 약정을 맺기로 했다. 4년 임기 중 발전기금을 200억 원 추가 유치하려고 한다. 2년 내 실사구시형 전문가를 25명가량 충원할 계획인데 자생력을 갖게 되면 정부에 예산의 절반 정도 지원을 요청하겠다. 내년 1월에는 ‘GIST홀딩스’도 설립해 창업 지원도 확대하겠다. 현재까지 교수와 연구원 40여 명이 창업했고 10여 명이 창업을 준비 중이다(학생 창업 38명 별도). 누적 기술이전액은 314억 원이다.
-과학기술 정책 전문가로서 정부의 R&D 예산 삭감 정책을 어떻게 보는가.
△R&D 효율성 제고와 국제 협력 강화 필요성에 공감한다. 다만 예산을 갑자기 삭감하면 연구자들이 단기 과제 수주에 집중하게 될 염려도 있다. 기초과학과 중장기 투자에 부정적 영향이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현재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예산 비중이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이므로 이제는 성과에 집중할 때다. 과학기술계도 성찰을 통해 새로운 전략을 짜고 장·단기 로드맵을 짜야 한다. 물론 정부도 과학기술계 설득에 미흡했는데 지금부터라도 협의를 늘려야 한다.
◆He is…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공업화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서강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도 취득했다. 1990년 과학기술정책연구원에 들어가 정책연구실장·기획조정실장·연구본부장·부원장을 역임했다.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과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거쳤다. 이후 박근혜 정부 당시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원장,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특임교수 등을 지낸 뒤 올 7월 제9대 GIST 총장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