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난민의 주요 목적지인 유럽과 미국에서 ‘불법 이민’이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정치적 갈등은 물론 국가 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선거를 앞두고 반(反)난민 정서를 부추기는 움직임도 잇따르는 모습이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수엘라 브래버먼 영국 내무부 장관은 26일(현지 시간)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AEI) 연설에서 “통제되지 않는 불법 이주는 서구의 정치와 문화에 대한 실존적 도전”이라는 강도 높은 발언을 내놓아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5년간 영국과 유럽으로의 이주는 적당한 수준을 뛰어넘었다”며 “다문화주의는 이민자에게 (새 사회로의) 통합을 요구하지 않고 이전과 같은 삶을 살도록 허용해 실패했다”고 말했다.
이날 발언은 유엔난민기구(UNHCR) 등 각계의 즉각적인 비판을 불렀지만 최근 미국·유럽이 ‘난민 위기’에 봉착했다는 지적에는 이견이 없는 분위기다. 미국 세관국경보호국에 따르면 국경수비대가 체포한 불법이민자는 6월 9만 9543명에서 8월 18만 1059명으로 늘어났다. 8월에 멕시코 인근 국경에서 붙잡힌 가족 단위의 불법이민자는 9만 1000명으로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유엔아동기금(UNICEF)은 올해 1~6월 이탈리아·그리스·불가리아·세브리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총 12만 9495명의 난민과 이주민이 도착했다고 집계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81% 증가한 수치다. 팬데믹 이후 저개발국의 경제 상황이 크게 악화한 점이 주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난민 대응을 둘러싼 논란도 격화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공화당 소속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개방적인 이민정책에 대한 부담을 (국경과 면한) 텍사스만 짊어져서는 안 된다”며 이주민들을 무료 버스에 실어 민주당 색채가 짙은 지역들로 보내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 버스를 이용하는 이들이 전체 이주민 중 극히 일부라면서도, 민주당 성향 지역의 재정적 부담을 높이는 효과를 내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례로 뉴욕시의 경우 올해 봄부터 7월 말까지 9만 명 이상의 이주민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을 수용할 재원이 부족해 JP모건체이스, 씨티그룹, 골드만삭스 같은 금융그룹 최고경영자(CEO)들까지 나서서 백악관에 지원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유럽은 개별 국가들이 각자도생에 나선 탓에 갈등이 더욱 뚜렷하다. 이탈리아는 최남단 람페두사섬에 올해 들어서만 10만 명이 넘는 이민자가 들어오면서 국가 비상사태까지 선포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오히려 밀입국을 막겠다며 12일 이탈리아와의 국경 통제 강화 계획을 발표했다. 앞서 유럽연합(EU)은 6월 난민 신청자를 회원국들이 분담 수용하고 이를 거부하는 국가에는 기금을 내게 하는 신(新)이민·난민 협정에 잠정 합의했으나 폴란드와 헝가리의 반대로 진전이 없는 상태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전략적으로 반이민 정서를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폴란드 집권 여당인 법과정의당(PiS)은 10월 총선과 함께 중동·아프리카 출신 불법이민자를 받아들일지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방침이다. 마테우슈 모라비에츠키 총리는 이 계획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이민자 혐오를 조장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가 X(옛 트위터)에 올린 투표 안내 영상에 폭동과 차량 방화 장면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예실괴즈 제게리우스 집권 자유민주당 대표가 23일 전당대회에서 난민 위기 해결을 위해 11월 총선에서 극우 정당과의 연정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 역시 8세 때 튀르키예에서 건너온 쿠르드계 난민 가정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