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에 ‘세계화 중단’ 현상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거세게 불었던 세계화 바람이 탈(脫)세계화를 거쳐 이제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공급망 생태계가 양분되는 재(再)세계화 국면에 접어들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중국에 대해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산업을 대상으로 규제의 칼날을 벼리고 있고 이에 중국은 광물과 원자재 수출 통제로 맞대응하고 있다.
미국이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거버넌스 변화를 통해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신실크로드)에 반격을 가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개편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것도 이 같은 전략의 일환이다. 글로벌 경제에 ‘상호확증 경제파괴(MAED·Mutually Assured Economic Destruction)’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각국이 기업 경쟁력 제고에 국운을 걸고 있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내년 3월 예산에서 현행 40%인 상속세율을 단계적으로 내린 뒤 몇 년 내에 폐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포르투갈·슬로바키아(2004년), 스웨덴(2005년), 체코(2014년) 등이 2000년 이후 상속세를 폐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15개국에는 상속세가 없다.
스웨덴은 역사로부터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1984년 상속세율이 70%에 달했을 때 제약 회사 아스트라AB(현 아스트라제네카) 설립자의 미망인이 사망하자 회사 지분을 물려받은 자녀들이 상속세를 내기 위해 주식을 처분했다. 결국 주식 대부분을 팔아도 상속세를 마련할 수 없었고 기업은 스웨덴을 떠난 후 영국 제네카에 넘어갔다. 글로벌 가구 회사 이케아, 포장 기업 테트라팩이 아스트라와 같은 험한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 스웨덴을 떠났다.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최대주주 할증세율 적용 시 60%)로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OECD 평균인 15%보다 35%포인트나 높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별세 이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한 일가의 상속세는 12조 원에 달한다. 일부 계열사 주식을 처분하고 은행에서 4조 원의 대출을 받아 상속세를 마련하고 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도 주식담보대출로 7000억 원이 넘는 상속세를 분할 납부하고 있다. 고(故) 김정주 넥슨그룹 회장이 타계했을 때 유족들이 넥슨 지주회사인 NXC 주식을 상속세로 내자 기획재정부가 2대 주주가 되는 촌극도 벌어졌다. 중소기업의 경우 상속을 포기하고 회사를 사모펀드에 넘기는 경우도 있다. 치열한 생존 다툼에서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국부(國富)를 갉아먹는 굴레에 다름 아니다.
법인세도 ‘시대의 주문’에 역행하고 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UBC)의 테리 문 교수가 퀘벡주 중소 제조 기업을 분석한 결과 법인세율이 종전 8%에서 4%로 인하된 후 근로자 소득은 연평균 1.37%, 고용은 1.74%, 유형자산 투자는 3.17% 증가했다. ‘유럽의 문제아’ 취급을 받았던 그리스는 법인세율 인하 등 시장친화정책을 통해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고 ‘유럽의 가난한 노파’로 불렸던 아일랜드는 한때 50%에 달했던 법인세율을 12.5%로 낮춰 해외 기업을 끌어들이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 첨단산업에 대한 법인세 혜택을 강화하는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세계 각국이 변화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한국은 먼 산 불구경이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해 25%였던 법인세를 22%로 되돌리는 세제 개편을 추진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의 반발로 1%포인트 찔끔 인하하는 데 그쳤다. OECD 평균(21.2%)과 비교하면 여전히 3%포인트가량 높다. 국제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은 저서 ‘예정된 전쟁’에서 독일 통일의 기반을 닦은 비스마르크의 경구를 소개한다. “바보 나라는 경험을 통해 배우고 현명한 국가는 남의 경험을 통해 배운다.” 기업을 옥죄는 도그마에 갇혀 국가 경제가 위태로워지는 경험을 해서는 안 된다. 스웨덴·아일랜드·그리스 등 혹독한 경험을 한 국가들에서 역사의 교훈을 겸허하게 배워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