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딸을 바라보는 강경남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아이들은 낯선 아저씨들과 언니들 앞이라 부끄러우면서도 아빠와 사진을 찍는다는 기쁨에 까르르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서울 강남의 한 스튜디오에서의 일이다.
강경남은 ‘강한 남자’ ‘승부사’ ‘멘탈 갑’ 등으로 불렸다. 상남자다. 하지만 요즘은 부드러워졌다. 마흔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가 희석제로 작용한 걸까. 가장 큰 요인은 여자 셋과 동거를 하면서다. 그를 사로잡은 여자 셋은 두 딸과 아내다. 강한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딸 바보’, 혹은 인스타그램에 ‘여보 사랑해♡’를 남발하는 ‘아내 바보’로 살아가는 중이다.
일상에서는 부드러운 남자로 변신했지만 필드에서의 강경남은 여전히 강하다.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통산 11승으로 동갑내기 박상현과 함께 현역 최다승을 달리고 있다. 현재 제네시스 포인트 6위, 상금 랭킹 5위, 평균 타수 5위를 기록 중이다. 올 시즌 14차례 대회에서 우승만 없을 뿐 준우승 한 차례, 3위 두 차례, 4위 한 차례 등 톱10에 여섯 차례 이름을 올렸다. 한국 오픈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한 덕에 메이저 대회인 디 오픈에 출전하기도 했다. 2004년 투어에 데뷔해 어느 덧 20년 차를 맞은 그는 한 번도 시드를 잃은 적이 없다. 상금 랭킹 50위 밖으로 밀린 적도 없다. 골프와 삶의 균형을 조화롭게 이루면서 꾸준함을 유지하는 비결은 뭘까.
그 답을 찾기 위해 강경남에게 만남을 청했다. 그랬더니 일곱 살과 다섯 살 두 딸, 그리고 아내도 함께 왔다. 첫째 딸이 아빠의 인터뷰 자리에 간다고 하자 유치원에 다니던 둘째 딸도 “그럼 나도 갈래”라며 졸랐다고 했다. 한 자리에 모인 가족을 보는 순간 강경남의 꾸준함에 대한 답이 보이느 듯했다.
첫째 딸의 꿈이 프로골퍼라면서요?
“첫째(유주)가 저를 되게 좋아해요. ‘아빠바라기’예요. 잠도 저랑 자고 목욕도 제가 씻겨줘야 해요. 어떻게 보면 참 슬픈 현실인데, 처음에는 제가 골프채랑 옷가방만 들고 나가면 엄청 울었어요. 자신도 골프를 하면 아빠랑 더 오래 있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골프를 하고 싶어 해요.”
그럼 직접 가르치기도 하나요?
“아뇨, 지금은 너무 어려서 다른 프로님한테 맡기고 있어요. 한 1년쯤 됐는데 보통 저 나이 때에는 몇 개 치다가 힘드니까 타석에서 내려오는데 유주는 50분 수업하면 한 번도 안 내려온대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후에도 스스로 하고 싶다고 하면 그때는 전지훈련도 함께 데리고 다니면서 해봐야죠.”
아이가 아빠한테 골프 가르쳐 달라고 안 해요?
“연습하는 걸 제가 보고 있으면 오히려 쑥스러워 해요. 처음엔 저 있으면 가라고 그랬어요. 근데 이번 여름방학 때는 집(아파트) 지하 연습장에서 둘이서 몇 번 연습도 하고 그랬어요.”
둘째는요?
“엄마 껌딱지로 살아요. 저와 언니가 연습장 간다고 하면 따라가긴 해도 아직 너무 어려서 그런지 별 흥미를 보이지는 않아요.”
여자 셋과 사는데 어때요?
“여자 셋…. 아~ 쉽지 않죠. 제가 맨날 우스갯소리로 우리 집에는 고추가 없다고 해요. 그래도 저는 첫째를 낳았을 때 둘째도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집안 분위기가 되게 좋아요. 항상 웃음이 끊이질 않죠.”
반대로 단점은요.
“아직까지는 크게 없는데, 굳이 한 가지를 꼽자면 수다로 인한 체력소모가 크다는 거? 하하.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말도 많고 에너지가 넘쳐요. 제가 소파에 누워 있으면 와이프는 절대 옆으로 안 오고 애들만 와서 확 안기면서 놀아달라고 해서 가끔은 체력적으로 힘들어요. 그래도 와이프가 정말 재밌고 아이들도 예뻐서 여자 셋과 사는 게 행복해요.”
아이들이 가끔 아빠 힘내라고 그림 편지도 써준다던데요.
“자주 써줘요. 그런 거 보면 정말 힘이 나죠. 첫째는 시합 다녀오면 다리 주물러 주면서 ‘몇 등 했어?’ ‘다음에 잘 하면 되지. 시합이 1년에 한 개만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말도 해줘요. 그런 거 볼 때마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죠.”
딸들 혹은 아내를 위해 난 이 정도까지 해봤다 하는 게 있을까요.
“시합 당일 아침에 포켓몬 빵 구하러 편의점 7군데 돌아보기도 하고, 포켓몬 빵을 100개까지도 구해봤다! 하하. 와이프를 위해서는 항상 ‘예스맨’요. 함께 쇼핑 다니고, 대화를 자주 하죠. 와이프가 그림을 좋아하는데 올해 디 오픈 마치고 런던에 머물면서도 미술관 몇 군데 둘러봤어요.”
집안일도 자주 도와주나요?
“시합 때문에 자주는 못하지만 집에 있을 때 설거지는 제가 하려고 해요. 주방세제 중에서는 버틀러(리빙 브랜드)가 좋다는 것도 알아요. 청소도 가끔 하고요. 골프 선수들은 짐을 스스로 싸는 게 일이다 보니 청소나 정리정돈 잘 하는 편이거든요.”
집안일 도와주는 게 혹시 생존을 위해서 아닌가요?
“물론 그런 부분도 없진 않죠. 하하.”
올해 처음으로 디 오픈에 다녀왔는데 그 얘기 좀 할까요. 어땠나요?
“정말 많은 걸 보고 느꼈어요. 대회 운영이나 시스템 부분에서요. 선수들이 100%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더라구요. 예를 들어 남자 대회인데도 아이 돌봄 서비스가 있었어요. TV로 미국 대회 보면서 아내들이 어떻게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응원을 할까 의아해 했는데 이번에 이해를 하게 됐죠. 당장은 아니지만 국내 프로 무대에도 그런 시스템이 도입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링크스 코스도 처음이었나요?
“아니요. 두 번째요. 2013년 스코틀랜드 오픈 때 경험했으니 이번이 딱 10년 만이었어요. 하~ 근데, 링크스는 정말 어려워요.”
뭐가 그렇게 어렵나요?
“일단 목표지점이 없어요. 홀은 이쪽인데 캐디가 엉뚱한 데로 치라고 해요. 허공에 치는 느낌? 타깃 없이 볼을 치니까 적응하기 어렵죠. 코스에 물이나 페널티 구역이 하나도 없는데도 페어웨이를 벗어나면 일단 1타를 까먹고 들어가요. 페널티 구역은 없는데 홀마다 페널티 구역이 있는 곳, 그게 바로 링크스 코스 같아요.”
1타 차로 컷 탈락해 아쉬웠는데요.
“첫날 벙커에서 몇 차례 빠지는 바람에 오버파(7오버파 78타)를 쳤어요. 둘째 날은 최대한 벙커를 피해가자는 작전을 세우고 코스도 눈에 익으니까 3언더파를 쳤죠. 디 오픈에서 60대 타수를 치고 싶다 했는데 그 바람은 이뤘어요.”
마지막 18번 홀에서는 이틀 동안 모두 버디를 잡았던데요.
“다른 선수들이 18번 홀이 어렵다고 했지만 저는 펜스가 코스 양쪽으로 빙 둘러 있고 갤러리가 보고 있어서 그 홀에서 버디를 잡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둘째 날 18번 홀에서는 두 번째 샷을 홀 네 발짝 거리에 붙여 이글 기회를 만들었죠. 근데 그게 돌고 나왔잖아요. 들어갔으면 컷 통과를 하는 거였는데 너무 아쉬웠죠. 그래도 로리 매킬로이, 조던 스피스, 토미 플리트우드, 토니 피나우, 제이슨 데이 등과 기념 촬영도 하고 아내와 추억도 쌓고 좋았어요.”
투어 20년차예요. 처음 투어 들어올 때는 어땠나요.
“그냥 재미있었어요. 근데 그때는 선배 프로님들이 어려웠죠. 시합장 공기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어요. 신용진 프로님, 강욱순 프로님, 최광수 프로님, 그리고 최상호 프로님도 아직 같이 뛰고 계셨을 때였거든요. 지금은 저랑 스무 살 차이 나는 후배들이 저한테 와서 편하게 형이라고 부르지만 20년 전에는 그런 말을 감히 꿈도 못 꿨죠. 항상 모자 벗고 깎듯이 ‘프로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사했어요.”
한때 별명이 ‘게으른 천재’였는데요.
“일단 저는 천재는 아니에요. 그리고 게으르다는 것도 사실과 조금 달라요. 지난 20년 동안 투어 생활을 하면서 국내 투어에만 전념할 때 제 상금랭킹이 10위 밖으로 벗어난 적이 거의 없어요. 상금왕도 했고 톱 10 안에도 꾸준히 들었어요. 그러기 위해 제 나름대로 숙소에서도 퍼팅 연습을 2~3시간씩 했고요. 그런데 놀 땐 확실히 놀았어요. 그런 면만 보시고 오해를 한 게 아닐까 싶어요.”
지금도 연습을 많이 하나요?
“사실 골프라는 운동이 너무 예민해요. 다른 종목은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가면 기본을 유지하는데 골프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손이 정말 많이 가고 신경을 많이 써야 해요. 가끔 와이프가 오늘 저녁은 그만 하고 쉬라고 해도 그게 습관이 될까봐 쉬지 않아요. 아이들 재우면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도 밤 11시에 일어나서도 퍼팅 연습하러 나갈 때도 있어요. 요즘은 젊은 선수들과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전보다 더 열심히 해요.”
어린 시절 다른 운동도 잘했을 것 같은데요.
“뭐 야구나 축구도 했지만 전문적으로 하진 않았어요. 그냥 남들 하는 것만큼 했죠. 골프를 이렇게 잘 할 줄은 몰랐어요.”
노력만 한다고 해서 오랜 기간 기량을 유지하는 건 아닐 텐데요. 비결이 뭘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째는 와이프 덕분이에요. 골프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줘요. 그게 가장 커요. 두 번째는 스폰서요. 사실 남자 나이 마흔 살이 되면 후원사가 거의 없어요. 있어도 계약금을 조금 주죠. 그런데 저는 지난해까지 제약회사에서 큰 도움을 받았고, 올해부터는 이전까지 서브 스폰서였던 대선주조에서 지원을 받고 있어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없이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죠.”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뭐가 있을까요.
“저는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볼이 날아가는 걸 보고 어떤 걸 고치거나 그러지 않아요. 대신 거울을 보면서 몸의 움직임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써요. 사실 올 시즌에도 대회장에 딸린 연습장 빼고는 아파트 지하에서만 연습했어요. 제 몸이 어떻게 움직여야 볼이 어떻게 가는지 연구하는 거죠. 점점 체력이 중요한데 힘을 아끼면서도 하는 이 연습법이 꾸준함의 비결이라면 비결이에요.”
가장 자신 있는 샷은요?
“아이언요. 후배들도 ‘형, 아이언 너무 좋다’는 얘기를 자주 해요. 올해 좋은 성적을 내는 것도 아이언이 좋아서예요. 주변에서 회춘한 거 아니냐는 농담도 해요. 하하. 아이언을 잘 치려면 최대한 기다려야 합니다. 모든 실수는 서두르기 때문에 발생해요. 자꾸 뭔가를 하려다가 방향도 틀어지고 콘택트나 터치감도 안 좋아지거든요. 몸은 항상 정면의 볼을 바라봐야 해요. 다운스윙 때도 손이 볼 앞에 올 때까지 몸은 기다려야 해요. 그래야 정확성이 높아지고 거리도 더 멀리 나가는 거예요.”
보완하고 싶은 샷도 있을 텐데요.
“퍼팅요. 퍼팅만 따라주면 우승 몇 차례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퍼팅도 젊었을 때는 진짜 잘했어요. 20대 초반에 우승을 많이 할 때도 거의 퍼터로 우승했거든요. 그런데 군대 갔다 오고 나서부터 가끔 생뚱맞은 퍼팅을 할 때가 있더라구요. 기복도 심해졌고요. 그래서 지금 전체 연습 중 70~80%는 퍼팅에 쏟고 있어요.”
역대 최다승 부문 공동 7위(11승)예요. 앞으로 몇 승까지 기대하고 있나요?
“개인적으로 15승까지 했으면 좋겠어요. 몸 관리도 잘 해서 나중에는 미국 PGA 시니어 무대인 챔피언스 투어를 뛰고 싶어요. (양)용은이 형과 가끔 연락하는데 너무 좋다면서 준비 착실히 해서 오라고 하더라구요.”
전성기 시절 미국 무대에 도전할 생각은 없었나요?
“지금 되돌아보면 그게 너무 아쉽고 제 골프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에요. 2005년 신인상 받고 2006년에는 상금왕, 2007년에는 하반기에만 3승을 하는 등 그때는 정말 볼이 잘 맞았어요. 친한 형이 ‘넌 필드에서 어떤 기분으로 볼을 치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농담으로 이렇게 답했어요. ‘코스에서 한발 한발 걸어갈 때마다 돈이 들어오는 것 같아’라고요. 그럴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어요.”
그런데 왜 PGA 투어에 도전하지 않았죠?
“군대 문제가 발목을 잡았어요. 목 디스크 때문에 신체검사 7급이 나왔고, 6개월씩 보류를 받아 해외를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거든요. 당시 스폰서와의 계약조항 중에는 해외에 안 나간다는 조건도 있었어요.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얽혔죠.”
강경남 하면 ‘멘탈 갑’으로 불렸어요.
“그랬는데 지금은 많이 약해진 것 같아 너무 슬퍼요. 하하. 20대 초반만 해도 남들 신경 쓰지 않고 저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가정도 생기고 이것저것 고려해야 할 것도 있다 보니 저만의 색깔을 조금 잃어버린 느낌이에요. 멘탈이 무너진 건 아니지만 예전에 비해 기가 약해진 느낌은 들어요.”
자신이 나이 들었다고 느낄 때는 언제죠?
“예전에 40대 형들 보면 가끔 엉뚱한 볼을 칠 때가 있더라구요. 잘 치다가 갑자기 왜 저러지 싶었는데 제가 40대가 돼서 체력적으로 힘들 때 순간 정신을 놓으면 가끔 그런 샷이 나오더라구요. 그럴 때 운동선수로서 적은 나이가 아니란 걸 느껴요. 그렇다고 시드만 유지하고 경쟁력 없는 선수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언제까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아마 마흔다섯 살까지는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근데 요즘 후배들 보면 점점 멀리 쳐요. 예전에는 300야드 때리면 멀리 친다고 했는데 지금은 300m를 쳐야 돼요. 티샷에서 30야드 이상 차이 나면 정말 힘들어요. 젊은 친구들이 피칭웨지를 잡을 때 전 6번이나 7번 아이언을 쳐야 하거든요. 파5 홀에서 저는 버디를 노리는데 그 친구들은 이글을 하느냐 못 하느냐의 게임을 하고 있어요.”
체력의 중요성도 실감할 텐데요.
“올해부터는 4~5개 대회를 뛰고 나면 1개 대회는 건너뛰고 있어요. 한국 오픈에서 준우승을 할 때도 2주를 쉬면서 준비를 했었죠. 그런 체력 관리 덕분인지 올해 모든 대회에서 컷을 통과했어요.”
어릴 적 꿈이 뭐였나요?
“자전거포 사장님? 삼천리 자전거! 하하. 제가 자전거 타는 걸 워낙 좋아했고 정말 잘 탔어요. 두 손 놓고 한두 시간 탈 정도고 웬만한 커브 길도 그냥 갔거든요.”
투어에서 홀인원은 몇 번이나 해봤나요?
“여섯 차례요. 아시안 투어, 일본, 한국에서 기록했어요.”
그럼 인생의 홀인원은요?
“딱 두 번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뭔가요?
“일단 골프를 시작한 게 제 인생 첫 번째 홀인원이죠.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연습장에 가면서 제 인생이 바뀌었잖아요. 두 번째는 군 전역 후 골프에 약간 시들어 있던 시절 아내를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들 생긴 거요. 조금 나태해진 느낌이었는데 와이프 만나면서 다시 볼트가 조여졌죠.”
아내의 어떤 점이 좋았나요?
“처음에 딱 봤을 때 예뻤어요. 그래서 만났어요. 그 뒤 만나다 보니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고 정이 많던데요. 똑 부러지는 느낌도 있었고요. 이 사람과 결혼하면 아이도 잘 키울 것 같고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자전거포 사장님을 꿈꾸던 소년은 이제 베테랑 골퍼가 됐다. 두 딸의 아빠이면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10년 후에는 젊은 날 이루지 못했던 미국 진출(챔피언스 투어)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은퇴를 할 것이다.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그냥 공 잘 쳤던 강경남요.”
그는 여전히 ‘강한 남자’였다.
[에필로그]
인터뷰 후 두 딸에게 아빠는 확실하게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가 됐다. 두 딸은 다음에 또 아빠 인터뷰를 지켜보며 스튜디오에서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면 아빠가 계속 좋은 성적을 내야 하니 강경남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 첫째 유주는 골프에 더욱 열심이다. 폼도 제법 틀을 잡아가고 있다. 그럴수록 아빠의 고민은 깊어진다. 프로골퍼의 길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딸의 스윙을 볼 때마다 흐뭇하다. 딸도 더 이상 아빠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하며 클럽을 휘두른다. 두 딸의 또 다른 관심사는 골프먼슬리다. 하루 빨리 자신들과 아빠가 함께 나온 책을 보고 싶다며 재촉한다고 했다.
PROFILE
출생: 1983년 | 정규 투어 데뷔: 2004년 | 소속: 대선주조
주요 경력: KPGA 투어 통산 11승
2021년 비즈플레이 전자신문 오픈 우승
2017년 진주저축은행 카이도 오픈서 통산 10승째
2006년 토마토저축은행 제피로스 오픈서 첫 우승
2006년 상금왕, 덕춘상(평균타수 1위)
2005년 KPGA 투어 신인상
2002년 국가 상비군
[서울경제 골프먼슬리]